[해외복합단지] 제4부 : 유럽 (4) 프랑스 '몽파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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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대전 직전까지 프랑스 예술의 중심지였던 "몽파르나스(Montparnasse)" 하루에 두번 얼굴을 바꾼다. 아침이면 파리가 "몽파르나스 타워(Tour Montparnasse)"에서 잠을 깬다. 넥타이를 깔끔히 매고 승용차와 전철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행렬. 현대도시 파리의 아침이 시작되는 곳이다. 시티뱅크, 더취셀, IBM 등 프랑스에 진출한 세계 일류 기업들이 몽파르나스 타워에 모여있다. 저녁이면 파리는 "몽파르나스 거리(boulevard Montparnasse)"에서 "옛 열정"을 회상한다.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자취를 가진 이곳은 웅성대는 밤거리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몽파르나스 타워로 대변되는 신개발지역과 옛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는 몽파르나스 거리. 파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지역이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한 20세기 파리의 모습(파리도시계획국 버나드 제임스)"이기도 하다. 몽파르나스는 그리스 델프신전이 있는 "파르나스" 언덕에서 빌려온 이름. 17세기초까지만 해도 인근 채석장에서 흘러나온 자갈이 쌓여 생겨난 인공적인 둔덕에 불과했다. 1780년 파리외곽 거주자들에게 출입통과세를 징수하기 위해 외곽벽이 건설되면서 이 자갈 둔덕은 사라졌다. 대신 값싸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카바레와 선술집이 밀집한 유흥중심지가 됐다. 19세기말에는 작가 자리, 화가 두아니에 루소 등이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했고 1910년부터는 세칭 "파리학파"가 몰려들어 명실상부한 문화의 거리로 도약했다. 피카소, 마티스, 스트라빈스키 등 많은 예술가와 망명지식인이 몽파르나스에서 "지적 둥지"를 튼 것. 낡은 건물이 무질서하게 난립했던 몽파르나스는 1958년 도시재개발법이 통과되면서 급변한다. 1961년부터 1973년에 걸친 도심개발사업으로 "라데팡스" 신도시와 함께 파리의 업무중심지가 된 것. 그 당시 에펠탑을 제외하곤 파리도심에선 6층 이상 건축물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개발이었다. 시민들은 격렬하게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퐁피두대통령(1975년 작고)의 의지는 더 강경했다. 56층 규모의 몽파르나스 타워는 높이만 2백9m에 달하는 반 타원형 건물. 3층과 12층짜리 부속빌딩 2개동이 있다. 저층부에는 10만평방m규모의 사무실이 있고 상층부에는 3만여개의 소규모 점포가 입점해 있다. 각층 높이는 평균 3.42m로 높게 설계됐으며 꼭대기까지 39초만에 올라가는 초고속 엘리베이트 25대가 설치돼 있다. 12만t에 이르는 빌딩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70m 고강도 쇠말뚝 56개를 박아 건물의 안정성을 높였다. 몽파르나스 타워와 몽파르나스 거리를 연결하는 것이 "1940년 6월 18일 광장(place du 18 Juin 1940)". 1967년까지 대서양 연안 브르타뉴 지방으로 출발하는 기차역이 있었던 곳이다. 기차역은 타워 동쪽으로 밀려나 TGV역사로 재건축되고 그 자리엔 화랑들이 들어서 몽파르나스 거리까지 이어지고 있다. 몽파르나스 거리 맞은 편에는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이 설계한 아파트가 있다. 부족한 주거기능을 보완하고 있는 셈이다. 고대 원형극장 형태와 장식이 가미된 2동의 이 아파트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져 주위의 현대식 건물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몽파르나스는 유럽에서 대표적인 도심재개발로 꼽히고 있으나 파리를 소개하는 그 흔한 어떤 그림엽서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도시주변 불량주거지를 전면 철거하고 고층건물로 대체, 토지이용을 고도화했지만 파리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단순 대규모 건물을 신축했을뿐 더욱 중요한 지역의 공간기능을 바꾸어 버렸다"(건축사 앙리 루소)는 이유 때문이다. 문화재가 가득한 파리 외관을 거슬리고 이질적인 지역구조와 경제가치 변화를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개발에 따른 문화적 가치파괴로 몽파르나스는 퐁피두대통령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지적되고 있기까지 하다. 바로 프랑스인만의 철학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재개발과 문화적 가치의 절충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사례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