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환란 1년] (2) '태국은 스스로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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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주현 기자 현지를 가다 ] 풍요의 나라. 옛적 이름은 "샴"이었다. "자유의 땅"이라는 뜻의 타일랜드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역사상 단한번도 외세에 굴함이 없었던 민족이었다. 이 자유의 땅에 요즘 다시 내걸린 구호는 역사의 위기 때마다 국민을 단결시켜 왔던 "타이 추어이 타이"(태국은 스스로를 돕는다). 기자가 방콩에 들어섰던 지난 25일. 때마침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날의 이슈는 바로 며칠전 개당 2바트에서 3바트로 인상된 계란 값. 계란은 태국사람들의 기본 식품이다. "우리 집은 여섯식구다. 매일 하나씩만 먹어도 한달에 1백50바트이상 돈이 더 필요하다. 매일 값이 오르면 가족들을 어떻게 먹이나"며 중년의 주부 렉뗍(48)씨는 울먹였다. 이에 앞선 지난 19일. 태국 출라롱콘 대학 경제학과 교수들은 정부에 공개탄원서를 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느니 차라리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자"는 것. 환란이 할퀸 1년은 대학교수들마저 "구제 금융을 포기하자"고 할 만큼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태국 국민들의 "고통 지수"를 높여놓고 있었다. 그러나 태국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기자를 만난 키티삭 태국 중앙은행 부총재는 단호한 어조로 "다른 방법이없다"고 잘라 말했다. 태국 중앙은행은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바트화를 공격하는 헤지펀드들과 가장 잘 싸워내 국제투기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어떻든 그의 말마따나 태국 정부의 위기탈출 해법은 간단명료했다. "IMF의 처방을 충실히 따르고 그 위에 "+알파"를 더 해낸다"는 것. 태국 정부가 추진하는 이 "IMF+알파 프로그램"은 정작 IMF의 요구보다도 강도가 더 셌다. "물가상승 등 부작용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 반드시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일 뿐"이라고 솜삭 테프스틴 산업부장관은 강조했다. 사실이 그랬다. 태국정부는 환란 발생 3개월만에 금융기관의 절반 이상을 쓸어버렸다. 지난해 11월 집권한 추안 정부는 그동안 56개의 금융기관을 폐쇄조치하고 4개 부실은행은 1백분의 1로 감자처분해 국유화시켰다. 7개 종금사도 정부가 경영권을 빼앗아갔다. IMF도 놀란 과감하고 신속한 조치였다. 환부를 도려내면서 많은 피가 흘렀지만 곧 새살이 돋아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국으로 속속 돌아오고 있는 외국자본. 방콕은행과 타이농민은행은 각각 8억5천만달러와 10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이 두 은행은 국제시장에서 새로 주식을 발행했고 신주는 성공적으로 팔려나갔다. 또 시암상업뱅크 등 3개 은행은 일본 산와은행 등과의 합작을 서두르고 있다. 외국 채권자들도 민간기업들이 지고 있던 단기부채의 80%에 대해 상환을 연기해 줬다. IMF 역시 태국정부의 과감하고 신속한 조치에 화답해 당초 요구사항이었던흑자재정 조건을 철회했다. IMF는 재정적자 한도를 국내총생산(GDP)의 3%까지 양보해 공공사업을 재개할수 있도록 허용했다. 태국 정부가 "IMF 장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런 적극적 개혁의지 덕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역시 높은 금리. 연 20%가 넘는 이자를 버티지 못해 올들어 이미 4천개 이상의 기업이 도산했다. 임대료를 못내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고 올들어서만도 이미 2백만명이 직장을 잃었다. 내수 침체 역시 한계선상에 와 있었다. 방콕 빠뚬완 거리의 쌈미띠왯병원과 밤룽락병원 현관에는 "치료비 최대 20% 추가 세일"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오지못할 만큼 서민생활이 어려워졌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판매고는 작년에 이어 다시 50%가 줄었고 자동차 경매시장은 팔려고 나온 차들로 북새통이었다. 지난 14일엔 경매장측이 할부값을 못낸 차만 팔도록 품목을 제한했으나 새벽부터 팔려는 차들이 몰려들어 정상적인 거래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20년간 장사를 해왔지만 이런 불경기는 처음"이라며 차초엔사오 거리에서옷장사를 하는 노비따(45)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저력의 "타이 추어이 타이"였다. 정부는 이 구호를 국민들에게 거듭 호소하며 "IMF+알파"를 밀어붙이고 있는 중이다. 가장 먼저 IMF로 들어간 만큼 가장 먼저 IMF를 졸업하겠다는 의지가 이 구호 속에 녹아 있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