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패러다임이 바뀐다] (3) '투자대상서 생산요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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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말 중견컴퓨터업체인 D사에선 긴급경영회의가 열렸다. 은행권의 대출금회수를 비롯 갈수록 자금사정이 악화된데 따른 대응방안을마련키 위해서였다. 이 회사는 이미 지난해말 전체임직원의 50%를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IMF이후 매출부진과 자금난으로 추가적인 조치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 자리에선 서울 신대방동에 신축한 신사옥과 제주도 골프장부지 등회사소유 부동산을 전부 매각키로 의견을 모았다. 헐값에라도 부동산을 팔아 회사를 우선 살려놓고 보자는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이 회사뿐만이 아니다. 내노라하는 회사일수록, 부동산 보유가 많을수록 고민은 더욱 크다. 97년 4월18일 서울 서초동에 자리한 진로그룹 사옥별관. 사실 부동산이 골칫거리로 등장한 것은 지난해 한보사태 이후이다. 한보사건이 터진 2개월뒤 부도유예협약대상으로 선정된 진로그룹은 현대 삼성 LG 대우그룹 등 부동산관계자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동산매각설명회를 가졌다. 한보사태이후 금융권이 자금줄을 죄어오자 장중보옥처럼 아끼던 부동산을 팔기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매각부동산 규모는 2조원어치. 이중엔 자타가 "노른자위"라고 인정하는 서초동 남부터미널 8천5백평부지 2천5백억원도 끼여 있었다. 부동산 매각을 지휘한 진로유통 H전무는 절반만 팔아도 자금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진로가 땅만은 알짜배기만 갖고 있다"는 업계의 부러움을 받아오던 차여서 내심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5개월도 안돼 진로그룹은 (주)진로를 비롯한 주력기업들마저 화의나 법정관리 길을 밟았다. 자구노력의 핵심인 부동산을 거의 못판게 그 이유였다. 지난 89년 남부터미널부지를 사기위해 회사(트럭터미널)까지 인수할 정도로 땅에 열성이었던 진로. 하지만 결국 땅이 회사까지 집어삼킨 꼴이 됐다. 이때부터 신문지상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수한 기업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대농 뉴코아 기아 두산 쌍용 한일 등. "자구노력을 위한 부동산매각"이란 똑같은 제목이었다. 부동산귀재로 알려진 나산 거평그룹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중 살아남은 곳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나마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다. 이유는 진로와 크게 다를바 없다. 부동산이 안팔려서다. 사는 사람은 없는데 모두 팔려고만 했으니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더욱이 IMF관리체제 이후엔 자금사정이 괜찮은 대그룹들까지 매물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따라서 현재 기업매물로 나와 있는 물량만도 50조원어치에 이르고 있다. 이는 96년말 현재 30대그룹이 보유한 부동산(2억1천만평 67조원어치)의 75%다. 급기야 토지공사가 나서 지난해부터 지난 6월까지 기업부동산을 1조5천억원어치 매입했다. 그러나 이 기간중 기업이 내놓은 매물은 5조7천억원어치나 됐다. 예산상의 제약으로 토공의 매입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도 기업부동산이 팔린 것은 매입가격이하가 대부분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업들의 부동산관도 완전히 바뀌었다. 기왕 있는 것은 가능한 빨리 팔아치우고 신규매입은 아예 엄두도 못내고 있다. 부동산이 이제는 재테크 수단이 아닌 애물단지라는 인식이 불과 1년남짓만에뿌리박힌 것이다. "팔 수 있는 부동산은 다 팔아 현금흐름을 개선하고 부채비율을 낮추자는게 요즘 기업들의 화두"(국민투신 서석인 이사)이다. 삼성그룹은 "값이 쌀 때 사두자"란 생각을 버린지 이미 오래라고 말한다. 꼭 필요한 사업용도 사는 것보다는 임차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삼성생명 이호재 이사는 "그동안 직접 사들였던 지방영업매장을 임차쪽으로 전환하고 포트폴리오에서도 부동산 투자비율을 낮출 계획이다"고 강조한다. 현대와 대우그룹 관계자도 과중한 금융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부동산에 투자할 이유는 없다고 역설한다. 이제 기업들은 부동산을 제품생산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로 보고 있다. 돈을 불리는 투자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우경제연구소 한용석 박사는 "현재 기업들은 자금활용도 기술개발 인력양성을 통한 생산성향상에 초점을 맞춰가고 있으며 장기적으론 생산구조의 틀까지 변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땅장사보다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부를 창출하자"는 기업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이란 설명이다. 한때 기업들의 부동산매입은 열병처럼 번져갔다. 망국병이란 국민들의 비난속에서도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기업들의 부동산집착증이 IMF이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게 성과라면 성과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