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경영인] (5) '강해진 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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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사의 영업담당임원 B부사장. 그는 지난 3월 이사회 멤버에서 제외됐다. 그가 이사회 멤버가 된 것은 상무로 승진하던 지난 92년. 그러나 올해 단출한 미국식 이사회가 구성되면서 명단에서 빠졌다. 처음엔 이사회 멤버가 아니라는게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이사회라는 것이 몇몇 임원들이 모여 앉아 커피나 나누는게 고작. 도장이야 총무부 여직원이 들고와 한꺼번에 찍어대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요즘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사회가 회사의 전권을 행사하면서 자신에겐 조그만 결정권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틀은 임원이지만 권한은 과.부장과 조금도 다를게 없다. 얼마전 일이다. 해외영업부에서 들고온 서류에 사인을 했다. 남미지역 대리점 지원 계획이었다. 그나마 수출이 늘고 있는 지역이다. 대리점이 영업망 확충을 서두르는데 일부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해왔다. 회사로선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선뜻 25여억원을 현지 대리점에 지원키로 했다. 구두로 사장의 승락도 얻어냈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걸렸다. 느닷없이 이사회 안건이 돼버린 것이다. 대표이사 전결 상한선이 이날 오전 열린 이사회에서 50억원에서 20억원으로 낮춰져서다. 새로 선임된 사외이사 2명이 이사회의 권한을 늘려야 한다며 강력히 주장한 결과다. 다음 이사회가 열린 것은 한달뒤.당장했어야 하는 결정이 한달이나 미뤄진데다 결과마저 "보류"로 나왔다. 해외경제 전문가라는 한 사외이사가 남미경제도 위험하다며 끝까지 반대했다는 것이다. 현지 대리점에는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회사 생활 30년에 과장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회사를 떠나야 할 날도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의 요체라는 미국식 이사회 제도가 어설프게 자리를 잡으면서 생겨나는 경영자들의 고민이다. 결정은 늦어지고 실무에 밝은 경영자들의 권한은 줄어들고 있다. 경영자들은 그저 이사회의 결정을 집행하고 그들의 지휘 감독을 받는 위치로 전락해 버렸다. 경영자 가운데 이사회 멤버인 집행이사라 해도 다를 것이 없다. 오너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여전히 무리다. 사외이사들도 오너의 표정이 달라지면 당장 말이 달라지고 만다. 집행이사들이 이사회에서의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거수기일 뿐이다. 게다가 소액주주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 걱정에 늘 불안하다. 권한은 없어지고 감시의 눈만 많아진 셈이다. 중견기업인 C사의 D사장은 최근 이사회에서 상반기 경영실적을 보고하다 치도곤을 당했다. 사외이사가 말끝마다 "소액주주의 권익"을 내세우며 열변을 토하는데 속수무책이었다. 구조조정을 위해 밤낮없이 뛰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익보전과 주가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비난 뿐. 그저 당기실적에나 주력할걸 괜한 앞날 생각을 했나보다는게 D사장의 후회다. "미국식 이사회가 자리를 잡으려면 경영자들도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 새로운 제도가 도입돼야 합니다" 경영자들이 주주들의 권익을 옹호해야 하는 것처럼 회사를 직접 경영하는경영자들의 권익도 똑같이 보호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못하면 내치고 잘해도 그만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외국의 최고경영자들이 수백만달러의 보너스와 스톡옵션의 혜택을 받는 것은 괜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글로벌 스탠더드 시대에 손발이 묶인 한국 경영자들의 한탄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