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뛰는 중소기업현장] (8) '화의결정이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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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리사장(55)은 생각을 바꿨다. "자살"이 아니라 "자수"를 택하기로 했다. 부도를 내고 대구 동화사아래 식당에 숨어 자살만 생각한지 넉달째. 돈도 다 떨어지고 바깥출입을 할 수 없어 감옥살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지난 1월 20일 아침 그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대구 범어동에 있는 지방검찰청을 스스로 찾아갔다. "15억원규모의 부도이니까 1년반은 살아야 할텐데" 처음 겪어야 하는 감옥살이여서 불안했다. 한사장은 지난 91년 경북 쌍림농공단지에 금산산업이란 전자식 등안정기 공장을 세웠다. 그는 이 분야에서 국내시장의 25%를 차지하고 세계에서 처음 래피트안정기를 개발, 일본에 월 50만개를 수출하기 시작한 시점에 느닷없이 부도를 당했다. 대구지검 4층에 있는 곽상도 검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면서도 한가지 아쉬움이 자꾸 남았다. "지금 1개월의 시간만 다시 준다면 회사를 회생시킬 수 있을 텐데" 이날 한사장의 자수를 접수받은 곽검사는 예상외로 호의적이었다. 회사가 부도난 사정을 차분히 들어줬다. 한사장은 "금산에 대한 근거없는 악성루머가 나돌자 7억원짜리 당좌어음을 갖고서도 이를 현금화하지 못해 부도를 냈다"고 설명했다. 서류를 자세히 검토하던 곽검사는 한달간 유예기간을 주겠다며 이 기간동안회사를 수습해보라고 했다. 한사장은 이날 오후 "불구속 입건"으로 풀려났다. 그는 넉달만에 처음 집에 들어갔다. 아직 불구속입건으로 풀려난 줄 모르는 부인 태순자씨는 그를 보자 반가워하면서도 누가볼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사장이 풀려났으니 안심하라고 얘기하자 부인은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날 저녁 그는 곧장 공장으로 달려갔다. 뿔뿔이 흩어진 사원들을 불러 밤늦도록 청소부터 했다. 이 공장의 소형모터 생산라인과 등안정기 조립라인은 완전 자동화된 설비여서 청소를 해줘야 정밀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였다. 한사장은 이날이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일단 화의신청을 위한 자료와 책자를 사와 밤새도록 공부했다. 매일 찾아오는 채권자들에게 화의결정이 나면 틀림없이 돈을 갚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그의 열정에 감동을 받은 기업은행 기보 신보 대한보증 우방금고등 채무자들이 화의신청에 동의해줬다. 금산산업은 지난 2월2일 화의를 신청했다. 지난 22일엔 대구지법 민사30부로부터 화의결정을 받았다. 한사장은 쌍림농공단지에 있는 공장의 숙직실에 기거하며 회사살리기에 바쁘다. 먼저 그동안 중단됐던 일본 미쓰비시와의 수출협상을 재개했다. 지난 27일 일본측은 샘플을 받아본뒤 수입해가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가격을 절충중이다. 또 네온사인을 대체 할 수 있는 형광등 점멸식 안정기도 개발, 곧 출하에 들어간다. 요즘 금산산업 공장안에 들어서면 자동화라인이 활기차게 돌아간다. 불구속과 화의결정이 이 회사를 다시 살려낸 셈. 한사장은 "일시적인 자금난으로 부도를 낸 기업에 대해선 화의결정을 확대해줘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금산도 불구속이 아니었다면 벌써 문을 닫았을게 아니냐"고 되묻는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