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슨 경제학' 출판 50년] '경제학' 변천사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성경"으로 불려온 폴 새뮤얼슨 "경제학"(Economics-An Introductory Analysis)이 발간된지 50주년을 맞았다. 이 책은 지난 48년 첫선을 보인 이래 1백만부 이상 팔려나가며 지금껏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프랑스어 독어 한국어등 10여개국 언어로 번역돼 세계 각국의 경제학 교실에서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다. 새뮤얼슨은 16세에 시카고 대학에 입학, 20세에 졸업했다. 이어 바로 하버드 대학원에 들어갔다. 하버드 재학중에 이미 세계적인 경제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32세때는 미국경제학회로부터 "소장파 경제학자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존 클락 메달을 받았다. 새뮤얼슨은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강단에 섰다. 하버드는 그를 유태인이란 이유로 거부했다. MIT는 당시 경제학 분야에서 결코 일류라 말할 수 없었다. 새뮤얼슨은 MIT를 "경제학의 메카"로 끌어올렸다. 하버드가 경제학 분야에서 MIT에 덜미를 잡힌 것은 새뮤얼슨 교수를 놓친 탓이란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새뮤얼슨의 최대 공적은 경제를 철저히 "과학화" 했다는 것. 그는 "경제학"의 모태인 "경제분석의 기초"(47년) 서문을 조지아 윌러드 기브스의 "수학도 또한 언어"란 말로 장식했다. 모든 경제이론은 모호한 자연언어 대신 엄격한 수학언어로 쓰여져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경제이론을 주관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새뮤얼슨은 수학을 경제학의 만병통치약으로 치켜세우진 않았다. 다만 경제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핵심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새뮤얼슨은 스스로를 "20세기 경제학의 마지막 제너럴리스트"로 부른다. 그의 연구가 수리경제학에서 경제사까지 경제전반을 총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하버드 대학원생 시절 당시를 풍미했던 "케인스경제학" 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케인스 이론에서 빠져있던 동태적인 측면을 보완하는 공헌을 세웠다. 동태적 접근을 통해 케인스 경제학을 경기변동 이론에까지 확대한 것이다. 특히 케인스와 신고전학파 경제학간의 갈등을 "신고전학파종합"이란 극적인 타협을 통해 깨끗히 정리해 냈다. "경제학"은 대개 3~5년 간격으로 개정작업을 거치며 경제학의 시대조류에 따라 색깔을 바꿔 나갔다. 그의 신고전학파종합은 60년대 경제학의 명실상부한 정통파 자리를 점령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후 미국경제의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면서 타격을 받았다. 이어 프리드먼을 수장으로 하는 "통화주의론"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렸다. 뒤이어 등장한 루카스의 "합리적 기대형성론"은 신고전학파종합의 운명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는 "경제학" 제8판(1970년)에서 신고전학파종합이란 말을 삭제해 버렸다. 그후 제14판(1992년)에서 미시경제학을 거시경제학의 앞에 올림으로써 미시적 기초를 중시하는 루카스의 주장을 수용했다. 기존 관행을 무시한 파격인 동시에 경제학의 대가다운 관대한 태도였다. 경제학을 하나의 언어로 엮어내려는 그의 노력은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중단이 없다. "경제학"이 50년간 변함없이 경제학 교과서중 압권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