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반으로 줄여야 합니까" .. 어느 은행원의 편지

"나라가 어렵다고 기업과 은행을 퇴출시키고 기업과 은행이 어렵다고 직원을줄이면 집안이 어려운 나는 가족을 줄여야하나. 부모님은 양로원으로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퇴출"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한 은행원이 팩스용지(A4) 12장 분량으로 심금을 울리는 장문 편지를 본사에 보내왔다. 오는 29일 파업을 앞둔 은행원들의 착잡한 심경을 엿보게하는 편지였다.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기에"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편지는 쓴 이의 복잡한 심경만큼이나 절망과 분노, 희망과 사랑을 여러갈래로 담고 있다. 무턱대고 은행을 나가라고만 하는 정부와 은행을 향해 쏟아내는 절망과 분노. 그러나 다른 한켠 "나의 가장 큰 힘"인 "나를 사랑하는 이"를 지켜내기위한 각오가 절절이 배어 있다. 편지는 여느 편지처럼 차분하게 시작했다. "좌절하고 낙심할 때면 나는 얼른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러면 좌절의 늪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소망의 언덕에 서게됩니다.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힘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고요한 마음도 잠시. 자신의 밥벌이가 걸려있는 구조조정 문제에 이르자 그는 이내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아무리 나라가 어려워도 일수찍듯 꼬박꼬박 세금 잘 낸 것은 우리네들 봉급쟁이들인데 봉급쟁이 줄면 세금도 줄텐데 혹시라도 세금은 2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요" "몇 백억달러 빌려준 IMF에서도 공무원을 반으로 줄이라고는 안했는데 몇 조 지원해준 정부에서는 직원을 반으로 줄이라 하니, 우리 은행도 대출해준 기업들에게 직원을 반으로 자르라 해야하나. 나는 또 친구에게 빌려준 돈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야하나" 감정은 읍소와 분노를 거쳐 일방적인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버텨보세 버텨보세 모든 것이 반으로 줄어 우리나라 인구가 반으로 줄 때까지" 그는 "정우군 손가락 절단사건" "영화 타이타닉"도 소재로 동원했다. 마치 그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자식에 대한 미안함으로 옮겨가면서 그의 감정은 극에 달했다. "학교에서는 한 학년 오를 때마다 부모님의 직업이 무어냐고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기업(바둑)을 한다고 할까요. 고기잡는 어부(낚시)라 할까요" 그의 자식걱정은 이렇게 이어졌다. "나라도 벌어서 학비내고 부모님도 공양해야지 하고 철없이 길거리로 뛰쳐나오면 그들을 반기는 것은 현란한 유흥업소 간판과 검은 손길들 뿐이니..." 가정의 평화마저 깨질 것을 걱정하기도 했다. "옛부터 가화만사성이라 했는데 집안이 편하지 못한데 나란들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격렬한 성토 뒤에 찾아오는 냉정함일까. 격문과도 같은 글을 촘촘히 적은 후 그는 다시 내면의 평정을 찾았다. "배부른 돼지에게 음식을 주겠는가 아니면, 배고파 우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주겠습니까. 재롱도 피워보고, 울어도 보고 떼도 써보고 하다하다 안되면 빌기도 하여보고...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는데 하늘은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동료들에 대한 서운함과 격려도 잊지 않았다. "가다보니 삼천포요, 둘러보니 벼랑이네 벼랑에서 떨어지기 전에 서로서로 힘을 합하세" 한편의 장시와도 같은 그의 편지는 "진정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 남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끝을 맺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