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25) '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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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회장의 담판 ] 61년 6월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실에 이병철 삼성회장(당시 사장)이 들어섰다. 바로 전날 일본에서 급거 귀국한 이병철 사장은 예상과는 달리 형무소 아닌 메트로호텔에서 하루밤을 묶었다. 그는 동경을 떠나기 직전 "빈곤제거를 위해 전재산을 헌납할 용의가 있다. 귀국하는 대로 절차를 밟겠다"고 외신기자들에게 밝혔었다. 당시 여론은 소위 "부정축재자 1호"인 이병철을 일본에 놔둔채 왜 조무라기들만 죄다 형무소에 구금하느냐며 군사정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한국의 분위기르 전해들은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십자가를 짊어질 각오로 귀국을 결심했다. "책모를 쓸 수 있다. 단 비열해서는 안된다"는 평소 그의 신조에 따른 것이었다. 부정축재자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 해결하겠다는 결심이었던 셈이다. 훗날 이병철 회장은 마음을 비우고 나니 머리에는 만상이 오르내렸으나 마음은 한결 가라앉았다고 술회했다.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필자를 가까히 했다.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여주곤했다. 특히 박정희와의 첫대면은 기회있을 때마다 언급했었다. 이병철은 첫 대면했던 박정희의 인상, 국가 지도자로서의 덕망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예지함과 세밀함을 총동원해 관찰 분석한 듯 했다. "언제 오셨습니까" 안부인사를 하는 박정희의 부드러운 음성에 우선 긴장이 풀렸다. 잠깐 침묵이 흐른 후 박정희는 "부정축재자 11명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군인답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아마 이 순간 박정희의 머리에는 바로 일주일전에 만났던 김용완 경방사장이던진 한마디가 머리를 스쳐갔을 지도 모른다. "일할 수 있는 기업인을 양성하려면 적어도 20~30년은 족히 걸립니다. 기업인들의 경험을 잘 활용하십시요" 박정희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이병철은 전신의 기력과 두뇌를 총동원해 응수했다. 이날의 만남은 대한민국에서 각각 재력과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두사람의조우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평소 어름같이 차고 냉철한 이병철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때의 회고담을 들으면 사기에 나오는 초패왕 항우와 유방의 홍문에서의 만남이 연상된다. 사마천은 이 만남을 지상에 두개의 태양이 떴다고 썼다. "천하의 이병철"은 권력앞에 물러서지 않았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들에게는 별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는 일순 표정이 굳어졌다. 침묵이 흘렀다. 이병철은 조용히 논리를 이어갔다. "나의 경우만 해도 탈세를 했다해서 부정축재자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조건하에서 돈을 얻어 경영을 잘 못해 탕진한 자는 대상이 되지 않고 경영을 착실하게 해서 세금을 내고 고용을 확대한 사람은 처벌대상이 되면 이런 모순이 어디있습니까" 비수같은 논리였다. 하긴 당시에 세제대로 하면 매출의 1백20%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정희는 세금 문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뗐다.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기업인의 본분은 사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마련하고 세금을 내고 확대투자를해서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기업인의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경제건설에 참석할 기회를 주도록 하십시요" 긴장 속에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박정희는 "그렇게 하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텐데요"고 말했다. 이병철은 "국가 대본에 필요하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가 아니겠습니까"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기업인 처리와 관련된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박정희는 다시 만날 기회를 줄 수 없느냐고 말하면서 거처를 물었다. 이병철이 지금 메트로호텔에 연금상태라고 하니 사뭇 놀라는 기색었다. 박정희가 조치를 취했는지 구속됐던 기업인들은 다음날 곧 석방될 것이란 전갈을 받았다. 이병철도 29일께 메트로호텔에서 풀려났다. 이병철의 폐부를 찌르는 논리가 박정희를 흔들어놓은 것이다. 이병철은 연산군때 비록 낙향을 했을지언정 대대로 천석 이상을 해온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빈농출신인 박정희를 부지불식간에 내리보았던 것 같다. 자서전에도 그렇게 쓴 것은 없지만 내가 곁에서 본대로 라면 그렇다. 실제로 박정희 시절에 이병철은 신년인사를 한적이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김용완 전택보 정인욱 이병철 등 기업인을 만나고는 "부정축재자"들을 경제발전에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이는 경제재건촉진회가 생겨난 과정에 잘 드러나있다. 당시 구속됐던 기업인들 가운에 올해 작고한 최태섭 한국유리 당시 사장이있었다. 그는 구속중에도 항상 여유있고 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했다. 당시 한 취조관은 최태섭의 이런 인품에 매료돼 한국유리 경비책임자를 자원해 평생 복무했다고 한다. 최씨는 무슨 연유에서 인지 석방될 때 군사정부 고위간부로부터 "경제단체를만들어 경제건설을 이끌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최씨의 얘기를 들은 기업인 13명은 석방 이튿날인 7월15일 하오 협회창립 준비회의를 가졌다. 장소는 대한양회 이정림 사장실이었다. 이들은 우선 몇가지 조직원칙을 정했다. 첫째 협회는 일반 경제단체와 색다르게 기간공업을 건설하는 실천조직으로 한다. 둘째 협회명은 당시 각계의 유행어가 되다싶이한 "재건"을 붙여 "경제재건촉진회"로 한다. 셋째 회원은 우선 공장을 건설할 13명으로 하되 앞으로 추가 모집토록한다. 넷째 창립총회는 7월17일에 개최키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창립취지문은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김성한씨에게 위촉키로 햇다. 정관 사업계획 예산 등은 경제협의회의 총무부장이었던 윤태엽씨가 만들기로했다. "부정축재자"들이 경제건설의 주역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