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창간 34돌] 기업 : 불황 이겼다 .. '신도리코'

서울 성수동에 있는 신도리코(대표 우석형)공장에 들어서면 포크레인 소리가 먼저 귓전을 때린다. 공장자동화와 직원들의 복지공간을 늘리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 소요재원 1백50여억원은 모두 회사 자금으로 충당됐다. 그만큼 재무구조가 탄탄하다는 얘기다. 올상반기에만 2백68억원의 순이익을 올렸을 정도다. 부채비율은 21.7%에 불과하다. 오히려 금융권에 여유자금을 맡겨 거둬들인 이자수익이 상반기에만 72억3천만원에 이른다. 신도리코 직원들의 얼굴은 항상 밝다. 불황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10여년전에 비해 인력규모는 9백명으로 변함 없는데도 외형은 3천억원으로 10배 성장한 기업에서 인력삭감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삼성 LG 현대 등 대기업의 추격을 물리치고 불황속에서도 여전히 국내 복사기시장의 40%를 점유하면서 수출로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는 신도리코의 경쟁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 회사는 38년간 한우물을 파면서 쌓아온 경쟁력이 불황을 이겨내고 있는 비결이라고 얘기한다. 실제 신도리코의 역사는 한국 복사기산업의 역사라고해도 무리가 아니다. 수익이 넘칠때도 곁눈질을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아는 사업을 하면 70%성공하고 모르는 사업을 하면 70% 도산한다"는 창업주 우상기 회장의 지론때문이다. 사업다각화도 복사기의 핵심기술을 토대로한 팩시밀리와 프린터쪽으로만 진행됐다. 특히 지분참여를 하고 있는 일본 리코와의 전략적 관계를 시대에 따라 적절히 발전시킴으로써 합작성공 사례로도 꼽힌다. 지난 60년 리코의 복사기를 수입판매하는 신도교역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64년 리코의 도움으로 국내최초의 복사기 생산에 나섰고 69년 리코와 합작,지금의 상호로 변경한뒤 성수동 공장시대를 열었다. 경쟁사인 롯데캐논과 코리아제록스가 생산에 나선 시점보다 3~7년 앞선 것이다. 시장선점효과를 누렸다는 얘기다. 기술력 쌓는데 총력을 기울여 82년 기술연구소를 설립한지 10년만에 복사기를 국산화, 한국산 복사기 시대를 열었다. 이는 리코로 하여금 신도리코를 단순투자대상이 아닌 생산과 연구개발 파트너로 인식토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기술개발이 합작사와의 관계를 변화시킨 것이다. 리코는 자사의 글로벌망을 통해 신도리코의 복사기를 팔겠다는 제의를 했고 이에따라 92년부터 수출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신도리코는 93년 핵심부품인 드럼을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초기에는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한국이 IMF관리체제에 들어선 이후 공급에 활기를 띠게 됐다. 환율상승에 따른 수입제품 가격상승 덕분이다. 신도리코는 94년 종이가 걸리는 현상을 자동제거하는 복사기를 세계최초로 개발, 명실공히 세계적인 복사기 선두그룹에 진입하게됐다. 이와중에서 리코는 빅바이어 역할도 톡톡히 했다. 작년에 50만대를 3년간 공급받기로 신도리코와 계약을 체결한 것. 올해 국내 복사기 시장이 6만5천대인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물량이다. 6백여개 대리점과 별도로 운영되는 12개의 서비스센터도 신도리코가 자랑하는 경쟁력의 숨은 공로자들이다. 복사기 특성상 사후서비스가 요구되는 것을 간파한 전략이 먹혀들어 간 것. 신도리코의 불황 대응 전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수침체를 극복키위해 50여개국에 공급하는 수출 비중을 작년의 30%에서 절반이상으로 높이고 있다. 10월초부터는 복사기 교체시 1백만원까지 보상하고 있다. 저가형 복사기의 경우 국내공급 가격을 수출가격보다 크게 낮췄다. 신도리코는 불황타파 전략과 함께 디지털화 복합화 네트워크화되는 복사기 프린터 팩시밀리의 추세에 적극 대응, 21세기 OA기기 일류업체로 거듭날 목표를 세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