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의례 자율화

"정치인은 주례를 서거나 축.부의금품을 줄수 없습니다" 지난 6월 지자체장 선거를 앞두고 나붙었던 플래카드의 문구다. 최근 같은 자리에 "정치인에게 주례나 축.부의금품을 요구하지 맙시다"가 걸렸다. 종래 정치인의 "표"는 본연의 업무능력보다 경조사 참석횟수에 좌우돼온 경향이 짙다. 의원 출신 장관이 주말이면 지역구에 주례서러 가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도 이런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인이 아니어도 우리 사회에선 흔히 경조사에 얼굴 내미는 횟수가 그사람의 사회성이나 됨됨이 평가의 기준이 된다. "하자니 부담스럽고, 안하자니 영 마음에 걸리고" "간소하게 치르면 좋겠지만 남의 눈때문에" 고민하다 대부분 무리하는 쪽을 택한다. 이 결과 우리의 한해 가정의례 비용은 혼례비 12조2천억원, 장묘비 1조5천억원, 경조비 5조2천억원등 18조9천억원으로 98년 정부예산 75조4천6백억원의 4분의1에 달한다. 정부가 69년에 만든 가정의례법을 폐지한다고 한다. 청첩장 발행이나 음식물접대는 94년 개정때 사실상 자유화된 만큼 이번 조치로 없어지는 건 굴건제복 착용과 특.1급호텔 결혼 금지및 화환개수 제한 정도다. 규제를 위한 규제는 철폐되는 게 마땅하다. 결혼이나 장례 방법을 법으로 규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형편껏 화려하게 치르는 걸 무조건 범죄시하는 것도 이치에 안맞는다. 그러나 규제 철폐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걸로 이해돼선 안된다. 자리를 이용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돌리거나 거래처에 팩스로 직원의 경조사를 연락하는 일은 퇴출돼야 한다. IMF시대를 맞아 각종 의례의 거품도 빠지고 있다. 결혼과 장례비용 모두 30%이상 줄었다. 직장의 축의금이나 부의금도 현실화돼 간다. 문제는 가정의례법이 있어 그나마 눈치를 보고 자제하던 사람들이 내로라 하고 잔치를 벌이고 화환을 늘어놓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시민운동으로 막아야 한다지만 사생활이 시민운동의 대상이 되는 것도 우습다. 가정의례법 철폐의 효과 여부는 이른바 지도층인사를 포함한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 변화에 달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