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27) 경제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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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인협회 창립 ] 경제재건촉진회의 창립취지문 몇 구절을 인용해본다. 이 취지문은 "임진왜란"의 작가이자 언론인인 김성한씨가 쓴 것이다. "(전략) 건설의 실천기구로 경제재건촉진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천목표인 기간산업 공장이 순차적으로 하나씩 세워지는 한편 반만년에 처음으로 시도된 민간외자도입 활동의 문호개방 등이 결실을 맺을 때 본회가 그 개척의 점화자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 취지문에는 경제재건촉진회의 특색이 잘 드러나 있다. 재건촉진회는 스스로를 "건설의 실천기구"라고 부르고 있다. 각 회원이 특정분야에서 공장을 책임지고 건설한다는 지극히 색다른 조직인 셈이다. 이 발상은 이미 여러차례 설명한 대로 5.16 군사정부의 것이 아니다. 한국경제협의회 때도 논의했던 "태백산종합개발구상"이 바탕이 된 것이다. 당시 재력있는 기업인들은 태백산을 관통하는 철도의 각 구간을 분담해 부설한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또 한가지 특색은 해외개방과 외자도입에 대한 "점화자"로서의 구상이다. 이들은 외자 및 기술 도입 세계적 최신 기업운영기법 연구 수출시장조사 및 개척 외국기업인 초청 등을 담당키로 했다. 외자도입과 수출촉진 등은 5.16 직후 소위 혁명주체 들이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사안이다. 재건촉진회 창립취지문에선 이처럼 비록 권력에 의해 본의 아니게 "부정축재자"라는 오명을 썼을 지언정 기업인들의 기백과 의지가 아직 살아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재건촉진회가 건설의 실천기구로서 한 일은 무엇인가. 경제재건촉진회는 창립 직후 기간산업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기간산업 공장건설 민간계획안" 작성에 총력을 경주했다. 당시 필자에게도 3개년 계획, 5개년 계획 등에 있어서 기간산업 분야 계획과그 기초자료에 대해 많은 문의가 왔었다. 이때만큼 경제계가 5개년 계획에 관심을 가졌을 때도 드물었을 것이다. 재건촉진회는 우선 1차 프로젝트로 시멘트 비료 전기 제철 화학섬유 정유 등을 기간산업으로 정했다. 61년 8월8일 이사회에서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의 브리핑을 듣는 동시에 구체적 세부계획과 설계를 위해 13명 회원이 이를 하나씩 책임지고 추진키로 했다. 우선 양회공장은 현재 쌍용의 전신인 금성방식(홍재선)이 맡기로 했다. 비료공장은 삼성(이병철)과 삼호(정재호)가, 전기는 대한제분(이한원)이 추진키로 했다. 이밖에 제철은 대한양회(이정림) 극동해운(남궁연) 대한산업(설경동) 동양시멘트(이양구) 등에서, 화섬은 화신(박흥식)과 조선견직(김지태) 한국유리(최태섭) 등이 각각 단독 또는 합작으로 건설키로 했다. 이때 정유공장은 가징 인기있는 유망업종이었으므로 정부가 직접 추진키로 했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재계 지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부각되는 인물은 단연 이병철 삼성사장이었다. 그는 이미 자유당 말기부터 한국 산업의 발전방향에 관심을 갖고 국내외 정보를 수집해왔다. 60년 정초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비료공장 외자도입을 승인받기도했었다. 그는 차세대 산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제일모직 간부였던 임연규 씨에게 조사시킨 결과 화섬에선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이 유행할 것이 분명했다. 화섬을 맡은 박흥식(화신)은 그러나 일본 도레이사의 시설을 헐값으로 도입해 레이온공장을 건설할 구상을 갖고 있었다. 레이온은 공해산업이자 사양산업으로 일본도 포기하는 상황이었다. 박흥식은 당시 서울공대 김동일 박사 등의 조언을 받고 이를 추진했다. 이때 이병철 임연규 씨 등은 박 사장에게 레이온 보다는 나일론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화신은 결국 레이온사업을 하면서 망했다. 20대에 이미 "실업계의 귀재"로 삼천리 강산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흥식의 화신은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재계에서 사라졌다. 이밖에 60년대초까지 무역과 섬유에서 왕자로 군림했던 삼호의 정재호,전기기기를 맡았던 대한제분의 이한원도 재계 지도자 대열에서 이탈하고 만다. 재건촉진회 13개 회원사 가운데 삼성만이 오늘날 5대그룹에 남아있다. 외부적인 힘에 의해 결성된 재건촉진회가 민간 경제단체로 탈바꿈하는데는한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창립총회에서 1개월후 회장직을 맡기로 했던 이병철 삼성사장은 61년 8월16일 임시총회를 열고 한국경제인협회를 출범시켰다. 이병철은 특유의 치밀성과 구상력을 동원해 이전 한달 동안 경제단체가 지향해야할 바를 연구했다. 그는 우선 5.16 직후 군인들이 중구난방식으로 표명하는 경제운영에 대해 방향부터 제대로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재건촉진회를 해체하고 조직이념과 기풍을 일신하는 새조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그래서 단체 명칭부터 바꾸기로 했다. 이전의 한국경제협의회를 다시 살리는 방안도 고려됐으나 새출발하는 마당에협의회의 창립이념을 계승할지언정 이름만은 바꾸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대한양회 이동준 회장과 어렸을 때 조부에게 한학을 배운 이병철 회장은 "경세제민 또는 경국제민의 뜻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한국경제인협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경제인"이라는 용어가 널리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한국경제협의회의 취지문 등에 드러나있는 대로 일본식 용어인 "실업인"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