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금강산] 땅에 입맞추며 귀향인사..승선자들 사연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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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하나도 변한게 없지만 고향은 기억속에 남아있는 모습과 영판 달라..." 현대금강호를 타고 47년만에 다시 고향을 찾은 권만희(70)씨. 북한 땅에 내려선 권씨의 가슴에는 고향에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집터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고향의 모습에 금새 목이 메어왔다. 그의 고향은 온정리에서 해금강으로 가는 길목의 양송리. "고향땅 한번 밟아 보는게 소원이었는데... 고향 사람들 손도 한번 잡아보고싶었고..." 관광버스 차창 밖으로 고향집을 열심히 찾던 권씨는 끝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도 궁금해서 왔지. 그런데 영 고향 맛이 나질 않아. 하지만 삼일포의 물은 하나도 변한게 없어. 자주 다닌 곳이어서 그런지 발길이 낯설지않아.물빛도 여전히 깨끗하고" 그는 해금강을 비롯한 금강산이 옛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했다. 이번 관광객 가운데 금강산이 고향인 사람들은 줄잡아 10여명. 이들은 선착장에 내리자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관광지에 미리 마련해온 제수를 펼쳐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50년만에 고향을 찾아 바위 젯상 앞에 무릅꿇고 절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분단의 아픔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금강산 관광길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한 실향민도 있다. 고향이 장전인 박순용(77)씨는 21일 북한출입국 관리관에 어머니 소식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씨는 "혹시 살아계실 것으로 기대했는데 안타깝고 슬프기만 하다"며 눈물을 훔치면서도 "그래도 반세기동안 궁금했던 어머니의 소식을 들은게 큰 위안"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날 금강산 옥류동 계곡에 간단한 젯상을 마련해 제사를 지냈다. "어머니"를 외치는 박씨의 오열에 주위의 관광객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고향이 금강산 인근은 아니래도 50년전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왔던 기억에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던 관광객도 많다. 지난 1939년 5월, 호수돈여고 졸업반이었던 임성예(79)씨는 1백20명의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왔었다. "절(신계사)도 없어지고 금강산 근처에 나무가 많이 없어졌어. 온정리 마을에는 기와집도 없었고 그때는 돌길, 흙길이었는데 지금은 포장이 돼있네" 열아홉 청춘에 맛본 금강산과 60년이 흐른 지금의 금강산에 대한 임씨의 심정은 남달랐다. "우리가 수학여행을 왔을 때는 5월이었어. 진달래가 온산을 빨갛게 물들였었지. 일주일간 만물상에 오르고 마의태자릉도 가고 비로봉 꼭대기까지 갔었지" 금강산을 한번도 잊어 본적이 없다는 임씨는 "구룡폭포와 만물상은 하나도 변한게 없어. 바위도 물도 다 그대로야"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다만 금강산 수학여행을 함께 왔던 친구들이 그리울 뿐이다. "친구들이 생각나. 갈라져서 만나지 못하고 다 세상을 떳겠지..." 그래도 금강산 여행은 즐거운 일이다. 삼일포에서 굳이 널찍한 산책로를 마다하고 흙길을 걷는 임씨의 얼굴에는 수학여행 당시 열아홉살의 모습이 되살아나는듯 했다. 이번 금강산 여행에는 지난 48년 김구 선생을 모시고 평양을 방문했던 김우전 전 광복회 부회장도 참가했다. 김씨의 고향은 평북 정주. 그는 "김구 선생과 평양을 다녀온지 5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평양은 못가도북한땅은 밟아 보겠다는 심정으로 금강산 여행에 나섰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북통일을 원했던 김구 선생의 뜻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이 눈물나는 분단의 역사가 끝나기를 바란다"고 감회를 대신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