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라니냐 한파

"여인네의 속살은 동짓달 자리끼처럼 차가웠다" 김주영의 "화척"에 나오는 대목이다. 예전 겨울엔 정말이지 방안에 둔 그릇의 물에도 살얼음이 덮혔다. 방에서조차 입김이 안개처럼 눈앞을 가로막고 웃목에선 엉덩이가 시렸다. 요강을 치우곤 참다 못해 나갔다 오노라면 문고리에 손이 달라붙었다. 대변은 얼어붙어 쌓이고... 집집마다 처마엔 고드름이 달렸다. 70년대초만 해도 어지간한 집은 이렇게 추웠다. 11월 하순이면 발목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쌓였다. 아파트가 늘고 보일러난방이 일반화되는 등 주거환경이 달라진 탓인지 날씨가 따뜻해졌는지 근래엔 옛날만큼 춥지 않다. 90년대 들어선 눈다운 눈 한번 안내린 채 지나간 해도 많았다. 그러더니 올겨울엔 90년대 들어 가장 추우리라 한다. 적도 부근 바닷물 온도가 2도가량 낮아지는 라니냐현상때문에 혹한과 폭설이겹치는 매서운 겨울이 되리라는 예보다. 유럽에선 갑작스레 닥친 한파에 많은 사람들이 동사했다. 경제가 조금씩 회복된다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아직 바닥이다. 가뜩이나 마음이 스산한데 기온마저 떨어진다는 얘기는 울적한 심사를 더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추워진다고 해도 수챗물이 그대로 얼어붙던 시절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문제는 어둑해져도 돌아갈 곳이 없는 노숙자와 아직도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는 수재민들이다. IMF로 후원금과 지원금이 줄어 냉방에서 지낼 판이라는 복지시설 사람들의 월동도 걱정스럽다. 폭설이 예고된 만큼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될 확률은 높아졌다. 여성감독 상드린 베이세가 만든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가 보여주는 것처럼 눈은 세상의 모든 어두움과 절망을 덮고 지쳐 각박해진 마음에 온기와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다. 하지만 창밖의 눈이 아름다운 것과 달리 한밤중 지하도나 비닐하우스에 몰아치는 폭설은 무시무시한 두려움에 다름아닐 것이다. 유난히 춥다는 올겨울 혼자 옷깃을 여미느라 호들갑을 떨기에 앞서 주위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쓰러져가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