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한 '세계의 CEO'] (25.끝) 가이자키 요이치로사장

일본의 도요타 소니 마쓰시타 등 성공적 글로벌 기업의 최고 경영자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 브리지스톤 가이자키 요이치로 사장이다. 가이자키 사장은 ''기술력이 일본기업의 강점''이라고 주장하며 주주 우위의미국식 경영과 당당히 맞선 인물이다. 그는 경영성과면에서 도요타의 오카다 사장,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사장,교세라의 이나모리 회장 등과 함께 일본 경영자도 세계 무대에서 업계를리드할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가이자키 사장은 일본 관서지방에 잇는 교토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6년간 지방은행에서 근무한 후 62년 브리지스톤사에 입사했다. 85년 임원이 됐으며 86년 상무, 90년 전문, 91년 부사장 겸 브리지스톤파이어스톤(BFS) 회장 등 초고속 승진을 거쳐 93년 브리지스톤사장이 됐다. 한때 일본의 손꼽히는 초우량 기업으로 통하던 브리지스톤사는 88년 미국 유수의 타이어 업체인 화이어스톤 (Firestone)사를 매수하면서 막대한 부채부담을 지게 됐고 결과적으로 본사의 경영마저 악화됐다. 93년 초에는 침몰 직전까지 몰려 특단의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개혁을 하는데 적임자로 떠오른 인물이 당시 BFS의 최고경영자(CEO)로서 2년여만에 BFS사를 흑자로 돌려놓은 가이자키씨였다. 가이자키 사장은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단행, 브리지스톤을 우량회사로 거듭 나게 했다. 또 다국적 기업으로 글로벌 전략을 명백히 제시했고 회사 내외의 자원을 집중하는데 성공했다. 가이자키사장은 93년 사장 취임 후부터 줄곧 "세계 제1의 타이어 메이커가 될 것"이라는 단순 명쾌한 기업전략과 2000년까지 "전세계 시장 점유율 20% 달성"을 제시시했다. 가이자키 사장은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은행에 다니다 입사했으며 브리지스톤사에서도 타이어쪽이 아닌 스포츠용품 및 자동차 부품 등 비주력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뒤늦게 타이어 사업에 투입됐고 BFS사의 최고경영자에 임명된지 2년여 밖에 되지 않아 브리지스톤 본사 사장직에 오른것이다. 그가 전례 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타이어 사업을 평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6년 브리지스톤은 미국의 굳이어,프랑스의 미쉐린 등과 세계시장을 놓고 힘겨운 싸움을 벌인 끝에 결국 왕좌자리에 올랐다. 93년 본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선언했던 초우량 기업으로의 전환 및 글로벌화 추진을 통한 세계점유율 20% 목표가 실현되고 있다. 사장에 취임한 지 3년6개월만에 3천억엔이나 됐던 부채를 1천억엔까지 줄였고 본사 종업원도 1만6천명에서 1만4천명으로 감축했다. 특히 관리직은 반으로 줄였다. 88년 매수한 화이어스톤사를 정상화시켜 96년 연결계상 이익이 1천3백억엔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가이자키 사장은 BFS가 정상화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판매력과 브랜드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가 BFS의 최고경영자로 취임할 당시만 해도 BFS는 하루에 1억엔의 적자를 내는 기업이었다. 그는 회사를 21개사로 분사화하고 사업의 방향및 목표 등에 대한 결정권을 회사에 맡겨 생산성 향상에 주력했다. 노조와의 협상에서도 생산성 향상에 배치되는 요구는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BFS의 미국인 종업원이 가장 먼저 배운 일본어가 다메 (안돼)였다. 이같은 노력덕분에 카이자키 사장 자신조차 낙관하지 못했던 2년여만의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가이자키 사장은 채산성이 떨어지는 사업 부문의 정리 및 통합을 강력히추진하는 자신을 "장의사 카이자키"라고 칭했다. 이를 테면 매출규모가 연간 1천8백억엔의 화공품 사업은 종업원 숫자가 3천명으로 꼼꼼히 내부를 들여다보면 단순한 중소기업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단일 제품의 매출이 1백억엔을 넘는 제품은 몇 개 되지 않았고 제품간 시너지효과도 작었다. 가이자키씨는 화공품 담당 상무 시절 화공품 분야가 전문 메이커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정비 및 의사결정의 신속성이 필요하다고 판단,약체 제품군을 통합하고 성장분야에 투자를 집중했다. 그 결과 골프공 사업의 점유율이 23%에서 45%로 늘어났다. 가이자키 사장은 특히 스피드 경영을 중시한다. 어려움에 빠진 회사를 살리기 위해 카이자키 사장은 "판매확대와 코스트 절감"을 동시에 꾀했다. 그 과정에서 즉단즉결의 스피드경영을 실시했다. 93년 3월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일본 브리지스톤 본사의 채산성을 높이기 위해 곧바로 경영합리화 작업에 들어갔다. 94년 임금인상을 업계 최저수준으로 억제하고 설비투자도 30%가량 줄였다. 부서도 25%정도 감축했고 과장 이상의 관리직원 수를 반으로 줄였다. 물론 처음에는 반발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뚜렷한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합리화 작업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이자키 사장은 매사에 확신을 갖고 일을 처리한다. 스스로 "기업 경영에는 비책이란 없으며 순리라고 판단되는 일을 서둘러실행하는게 바로 스피드경영"이라고 강조한다. 글로벌화를 추진하려는 의지도 확고했다. 미국 BFS의 파업에 대처할 때도 글로벌 기업을 실현하기 위해선 어느 공장도 예외없이 생산성 향상에 주력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노조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냉철하고 정확히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종업원에게 "보고를 위한 보고서는 필요 없다"며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부각시켜 재빨리 해결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브리지스톤은 소니사와 더불어 미국 기업을 매수해 성공적으로 이끌어간 몇 안 되는 일본의 글로벌 기업중 하나로 꼽힌다. 국제화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80년대 후반 자본력을 바탕으로 해외 부동산 및 기업을 사들인 일본 기업중에는 낭패를 본 기업도 적지 않다. 따라서 브리지스톤의 성공사례는 일본 및 아시아의 글로벌화 하려는 기업들에게 주는 교훈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