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메가트렌드] (대담) '21세기 한국의 국가전략'

99년은 격동의 20세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밀레니엄(millennium)을 준비하는 한해다. 한국경제신문은 국내외 석학들의 릴레이 대담을 통해 가는 백년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미래의 좌표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 첫회로 "한국의 미래 국가상"이란 주제로 김진현 서울시립대총장과 김경원 사회과학원장의 신년 대담을 싣는다. 김 원장은 "한국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21세기를 앞두고 진로에 대한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며 "명백한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국가상을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장은 "한국은 통일국가란 근대국가상과 정보화.세계화로 대변되는 미래국가상을 동시에 정립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정치지도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김진현 총장 =21세기가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전세계 언론과 정책결정자들이 함께 한세기 또는 1천년이라는 역사시간을 의식하는 최초의 전환기입니다. 김경원 원장 =미래를 생각하기 전에 과거를 잠깐 돌아봅시다. 지난 1년은 한국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한해로 기록될 것입니다. 특히 미래가 불확실성을 넘어 예측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당혹케 만듭니다. 지난해 중반까지 아시아 금융위기를 점쳤던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다들 아시아의 기적적인 성장을 찬양하고 아시아적 가치로 눈을 돌리고 있었죠. 한국은 더욱 근시안적이었습니다. 당시 외신들이 한국경제의 위기를 예고하자 법적대응까지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지 않았습니까. 21세기를 내다보기 위해선 먼저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총장 =경제예측의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예측은 어김없이 빗나가고 있죠. 왜일까요. 역사의 틀과 구조가 급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하려는데 문제가 있어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국경을 넘나드는 정보와 자본 흐름에 국가 통제력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글로벌 리더십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김 원장 =세계의 역학구도가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내년 출범하는 유러화를 사례로 들어보죠. 유럽단일통화인 유러화가 성공한다면 유럽 경제력이 미국을 능가할 가능성도있어요. 세계역학 구도에서 일본은 물론 아시아 영향력이 축소된다는 얘기죠. 한국경제는 진로에 대한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명백한 문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국가상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경제뿐이 아닙니다. 안보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엔 한반도 통일시대가 열립니다. 결국 미래 국가상에 대한 논의는 21세기 경제전략을 수립하는 동시에 통일시대의 국가위상을 정립하는 것으로 요약되겠죠. 김 총장 =최근 30년간 세계경제는 평균 5%를 웃도는 경제성장을 구가해 왔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번영을 꽃피운 시기였죠. 21세기는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될 것입니다. 혼돈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시대죠. 교육으로 훈련되고 정보로 무장한 대중은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갈 것입니다. 권력의 균등한 배분도 요구할 것입니다. 21세기에 닥칠 "통치의 위기"를 예고하는 대목입니다. 말하자면 리더십의 실종이죠. 국가 통치력이 지금처럼 현명한 한명의 지도자나 중산층의 컨센서스에 의지하긴 어렵게 됩니다. 김 원장 =통치위기는 이미 "발등의 불"입니다. 미국은 내부 정치문제로, 일본은 경제문제로 각각 리더십을 상실했습니다. 러시아는 무정부 상태로 치닫고 있죠. 지난 수십년간 미국정책을 따라온 유럽은 극심한 실업사태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기존 자본주의를 넘어선 제3의 길이 등장해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경제체제에도전장을 던지고 있습니다. 김 총장 =한국은 엄격한 의미에서 시장경제를 시행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경제를 시도한 경험도 없습니다. 어느 체제도 스스로 실험을 해본 일이 없다는 얘기죠. 제3의 길은 자본주의와 계획경제를 충분히 실험해 본 국가에서나 나올 수 있는 시도죠. 한국은 국가상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화가 주도하는 새로운 역사속으로 빨려들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근대와 미래 국가상을 동시에 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통일국가라는 근대국가상을 정립하는 한편 정보화 세계화로 상징되는 새로운 미래국가상을 세워야 합니다. 이같은 문화사적인 전환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미래상을 갖고 역사를 창조적인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일단은 시장경제에 충실해야겠죠. 그러나 시장은 실업과 빈부격차라는 부작용을 낳게 마련입니다. 시장경제 논리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실업에 따른 박탈감을 막아줄 충분한 사회안전망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빈곤의 근본원인을 개인능력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 철학도 확립돼 있지 않습니다. 시장경제의 부작용은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여기엔 정치지도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필요로 합니다. 정치지도자들은 반드시 도덕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또 흑백논리나 폐쇄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김 원장 =제3의 길에 대해선 이미 3년여전에 연구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결론은 제3의 길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 문제는 시장경제 질서안에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로 풀어가야 합니다. 체제변화를 통해 단숨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금물입니다. 김 총장 =21세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게 정보화입니다. 정보화.지식화는 21세기를 지배할 새로운 조류입니다. 국토가 작고 자원은 부족하지만 국민들의 욕망이 높은 한국 실정에선 정보화.지식화만이 유일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지식산업으로 가는 다리는 반도체 자동차등 주력산업이 놓아줘야 합니다. 앞으로 10~15년은 주력산업 고도화에 주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벌어들이는 부가가치를 지식기반 산업육성에 영양분으로 활용해야죠. 한국의 기업.산업 구조조정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어떤 산업을 주력으로 하고 어떤 산업을 포기하느냐 하는 문제는 고도의 경제적인 선택입니다. 산업구조 개편은 한국의 미래상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결정해야 합니다. 아시아 경제위기는 한국엔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고 봅니다. 이번 위기가 없었다면 철강 조선 등 제조업분야 주도권은 동남아시아나 중국으로 넘어갈 처지였죠. 동남아시아는 이번 위기로 대형투자를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당분간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을 따라오긴 힘들다는 얘기죠. 한국은 5년안에 비교우위를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분야를 신속히 키워내야 합니다. 한국은 향후 5년간 제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점차 잃어갈 것입니다. 한국이 일본의 경제성장을 뒤좇았듯이 후진국들은 빠른 속도로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을 따라잡을 것입니다. 결국 제조업 주도권은 후진국에 넘어갈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단순 제조업은 이미 공급과잉시대에 접어드는 징조를 보이고 있죠. 한국은 이번 아시아 위기를 오히려 호기로 삼아야 합니다. 10년후 지식산업을 국내 주력산업으로 일으키는 과도기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김 원장 =IMF체제위기 이후에 한국기업이 외자유치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다국적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는 사례는 그다시 많은 것 같지 않아 아쉽습니다. 앞으로 전략적인 제휴를 통해 선진기술과 경영기법을 개발하는데 나서지 않는 기업은 발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휴를 통해 기술을 축적하고 경영 노하우를 높여야 합니다. 대폭적이고 깊이있는 전략적 제휴가 필요한 시기죠. 정보화에 대한 개념도 정립해야 합니다. 최근 미국 폴 크루그먼 교수는 정보화의 함정을 지적했습니다.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제조업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이죠. 한국은 제조업 분야에서의 강점을 계속 살려가야 합니다. 이들 산업에 활력을 되찾아 주는 일이 시급합니다. 특히 한국 재벌은 환란의 주범, 시장질서의 파괴자라는 오명을 썼습니다. 이같은 이미지는 앞으로 재벌들이 국제경쟁을 해나가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오명을 씻는 길은 하나입니다. 재벌 스스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주력분야에서 세계 일류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죠. 한국사회의 관료화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상명하복과 규격화된 사고로 상징되는 관료화는 직업관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사회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관료화라는 병폐가 뿌리깊게 박혀 있습니다. 김 총장 =관료의 프로정신이 강화돼야 합니다. 한국관료는 전문화가 부족합니다. 왜 각 부처마다 연구소가 많습니까. 관료들이 전문성을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차라리 경험있는 연구원에게 행정을 맡기는게 나을 겁니다. 그러기엔 관료의 벽이 너무 높습니다. 합리적이고 도덕성을 갖춘 리더십만이 관료권력을 타파할 수 있죠. 정치가 부패하고 정권의 합법성이나 도덕성이 부족하다면 관료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역대 과거 정권에서 관료 병폐를 잡지 못한 것은 도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김 원장 =전문화와 관료화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관료화는 직위를 정해놓고 상명하복에 따라 의사를 결정하는 시스템입니다. 반면 전문화는 동등한 위치에서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해법을 마련하는 것을 뜻하죠. 한국은 너무 관료화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의 정부개혁은 관료를 전문화하는데 중점을 둬야 합니다. 김 총장 =교육에도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는 인성교육은 교과서에만 있습니다. 교실이나 사회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지역.파벌주의는 모두 인성교육이 부재한 탓입니다. 지연 혈연 학연 등 인연의 범위를 넘는 사회통합 능력을 쌓아가지 못하면 통일의 기회가 오더라도 실현시키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과교육에 앞서 사람만들기 교육이 강화돼야 합니다. 김 원장 =교육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서양속담에도 있듯 "애기 목욕물을 버리면서 애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해선 안됩니다. 한국교육의 강점을 포기해선 안된다는 얘기죠. 한국교육은 투자에 비해 상품(졸업생) 경쟁력이 뛰어납니다. 유학생들이 해외에서 보여준 뛰어난 실력이 이를 입증하죠. 입시제도는 지옥인게 사실입니다. 개선되고 완화돼야할 대상이죠. 그러나 경쟁이 한국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진학시험을 없애고 무시험 진학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은 재고돼야할 것으로 봅니다. 김 총장 =자유화는 당분간 한국을 지배하는 대세가 될 겁니다. 교육제도도 과감하게 풀어줘야 합니다. 대학입시는 대학에 맡겨야죠. 김 원장 =21세기는 통일의 시대입니다. 미래국가상엔 통일된 한국의 모습이 담겨야 합니다. 김 총장 =한국은 지난 1백년간 해양세력인 일본과 대륙세력인 중국 사이에서 "반도국의 비극"을 겪어왔습니다. 해방후엔 이들의 얼굴색깔만 바뀌었죠. 일본과 중국이 미국과 러시아로 바뀐 것뿐입니다. 한국은 한반도 통일을 이뤄 반도의 비극을 "반도의 행복"으로 바꿔가야 합니다. 김 원장 =통일에 대비해 통일비용을 따로 쌓아가는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정부가 그 돈을 관리하는 것은 더욱 그렇죠. 김 총장 =통일비용을 마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국가경제를 살찌우는 것입니다. 통일은 정책이나 방안으로 이뤄지는게 아닙니다. 평화와 복지를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거두는 결실이죠. 김 원장 =독일에선 통일이론도 별로 없었죠. 우리도 남북한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줄이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