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새해를 열며...진정한 '합'의 새해 기원..이문열

이문열 새 해가 떠오른다. 묵은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 밝음이 떠오른다. 소자는 그의 유명한 적벽부에서 달을 두고 이지러짐과 참, 뜸과 기움이 있을 뿐 본질은 같다고 했다. 해도 또한 같이 말해질 수 있을지 모르나 신화는 그렇지 않다. 동지는 죽음의 의식과 연관되고 신년식은 흔히 재생의 의식으로 치뤄진다. 묵은 해와 새 해는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반의 해와 그것이 지고 난 뒤의 어둠을 살아왔다. 언제나 어제의 정은 오늘의 반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반의 해 아래 부정과 부인의 낮과 비난과 지움의 밤을 지새워 왔다. 물론 반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 떠들썩하게 합이 지향되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식으로 추구된 적은 없었다. 지난 해도 그랬다. 앞선 정권들과 여러가지로 기질과 성향을 달리 하는 정권으로의 수평적 권력이동이 있었을 때 우리가 기대한 것은 조화로운 합의 해였다. 부정과 부인과 비난과 지움의 해가 지고 서로 핥아주고 어루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날들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데 그 해가 지고 돌아보는 지금의 심경은 결코 밝지가 않다. 지난 한 해 우리가 되풀이 느낀 것은 아직 지지 않은 반의 해였다. 지난 시대의 정의는 거의 어김없이 악이 되고 공은 일쑤 과로 뒤집혔다. 지난 시절 공안의 칼날 아래 움츠렸던 좌익은 이제 그렇게 움츠렸던 만큼이나 자랑스런 정신의 표지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근엄하게 국익을 대표하던 우익은 천박하고 자발없는 시정잡배에게 여지없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오랫동안 우리를 분열시켰던 지역감정의 문제도 다만 반으로 진행했을뿐이란 느낌을 준다. 한 지역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은 그만큼 불합리한 우대로 바뀌어 새로운 형태의 지역감정을 축적해 간다. 반의 햇살은 문화도 비껴가지 않을 듯하다. 지난 시절 그나마 남아있던 엄숙주의나 진지함의 추구는 이제 공공연한 놀림거리가 되고 문화의 현장은 경박한 웃음소리만 드높다. 거기다가 더욱 기막힌 일은 그 웃음마저 좌우의 색채를 띠게 된 일이다. 극우는 웃음을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극좌의 한 형태였던 소비에트연방은 웃음의 제국이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새롭게 뜬 이 해를 비관만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오늘을 일궈낸 정신의 이데아를 믿는다. 지난 시대 서슴없이 자기를 내던질 줄 알던 그들의 용기를 믿고 냉정하게 그 시대의 부조리를 짚어가던 그들의 지혜와 이성을 믿는다. 지난 해는 지난 시대의 마지막 어둠이었을 뿐 이 아침 떠오른 해는 새로운것이기를 기대한다. 병든 곳은 도려내야 하지만 그 상처는 사랑으로 아물어야 한다. 도려내는 것보다 더 큰 정성으로 봉합되고 돌봐져야 한다. 악과 부조리는 제거되어야 하지만 그 제거의 철저함에 못지않게 그 자리에새로운 악과 부조리가 들어서는 것이 경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떠오른 이 해는 되풀이되는 반의 해가 아니라 진정한 합의 해가 될 것이다. 더구나 올해 1999년은 우리 밀레니엄의 마지막 해이다. 듣기로 바빌로니아 제국의 세계종교로 기능했던 마르두크 신의 번성은 5천년 가량이었다고 한다. 다섯번의 밀레니엄을 관통했으니 우리가 흔히 비유하는 말로 치자면 강산이5백번 바뀌고도 남는 긴 세월이다. 거기에 비하면 크리스트 2천년은 아직 젊은 나이다. 다시 말해 징벌의 신에서 사랑과 교화의 신에게 맡겨진 뒤의 2천년은 종말을 얘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세월로 보인다.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가는 마지막 해, 이것도 새해를 절망보다는 희망으로맞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새해에는 세계도 무분별한 반의 논리에 지배되는 질서보다는 합을 향한 인류적 노력의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