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메가트랜드] '20세기 빛낸 기업인 20인' .. 국내

기업은 자본주의의 꽃이며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는 원동력이다. 인간이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업의 덕택이다. 기업은 근로자의 땀과 기업인의 개척자 정신의 결정체다. 이들 기업인중 금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 한국경제신문은 1900년대를 마감하는 1999년의 첫날을 맞아 ''20세기 한국경제를 빛낸 기업인 20인''을 선정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도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20인의 기업인''을 최근 선정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남다른 모험정신을 발휘했다는 것.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거대한 댐과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철강 자동차 조선 전자 유통 제약 및 오락회사 등을 설립, 물질적인 편리함 뿐 아니라 정신적인풍요도 제공했다. 한국경제신문이 99명으로 구성된 경제뉴리더그룹에 의뢰, 선정한 기업인에는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을 비롯 이병철 삼성창업자, 구인회 LG창업자, 김우중 대우회장 등이 포함돼 있다. 신격호 롯데회장,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도 들어있다. 이들중 절반이상은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한국경제의 기둥역학을 하고있다.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기업가에는 자동차왕 헨리포드, 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 영화거물 월트디즈니, 지구상의 최고갑부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가 포함돼있다. 또 미국 자동차노조 대표를 지닌 월터 뢰더, 화장품제국 건설자인 에스티로더, 전미풋볼연맹 이사였던 피트 로젤, 맥도널드 체인말을 구축한 레이크록도 반열에 올랐다. 특이한 것은 마피아 두목인 러키 루치아노가 이 대열에 끼었다는 것. 범죄조직에 기업경영을 도입해 성공했다는게 선정이유다. 이들중 여성과 흑인은 각각 1명씩 포함돼 있다.-----------------------------------------------------------------------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는 역사를 이끄는 주역이다. 경제분야의 경우 기업인이 이 역할을 맡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창업자들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으로 가득찬 사람들이다. 한국경제가 선정한 기업인중 대부분이 창업자인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할수 있다. 이들은 황무지와 같은 이 땅에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야에 도전, 보란듯이 해낸 것이다. 첫번째로 꼽히는 기업인이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소 판돈을 갖고 가출, 세계적인 건설업체와 조선소를 일궈냈다. 특히 도크를 완공하기도 전에 한국돈에 새겨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해외에서 선박을 수주하는가 하면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경부고속도로를 말끔하게완공했다. 해외건설현장에서 보여준 성과는 더욱 값지다. 팔순이 넘는 나이에도 ''황소경협''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굳게 닫힌북한문을 여는 등 청년 못지 않게 활동하고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87년 별세할 때까지 경영의 귀재로 평가받았던 기업인이다. 치밀하고 완벽한 기획과 경영으로 오늘의 삼성을 키워냈다. 삼성물산 제인제당 제일모직 등을 설립, 무역과 설탕 모직사업을 시작했고특히 반도체산업 진출을 결정, 오늘날 반도체가 한국의 대표적인 산업으로자리잡는데 공헌했다. 기업은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게 그의 대표적인 경영신조다. 구인회 LG 창업자는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업을 주로 펼쳐온기업인이다. LG의 뿌리가 된 LG화학을 창업, ''동동구리무''로 유명한 크림생산에 나섰다. 당시에도 한국인이 외제선호는 심각해 케이스에 미모의 외국여배우 사진을인쇄해 팔아야했다. 이후 줄곧 국내에서 첫번째 사업을 일궈왔다. 전자회사를 만들어 국내 최초로 라디오를 생산했고 플라스틱, 치약을개발하는 등 화학 전자제품의 상당수를 국산화했다. 김우중 대우 회장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불철주야 일하는 기업인이다. 최근 뇌수술을 받고 곧바로 경영일선에 복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했다. 전경련의 회장으로 재계의 공통관심사를 챙기느라 더욱 바쁘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경영''의 주역이다. 그동안 그가 다닌 거리는 1천만km. 지구둘레를 2백50바퀴 돈 것과 마찬가지다. 1백10개국에 6백4개의 법인과 지사 및 연구소를 세워 광대한 네트워크를형성했다. 우리가 살 길은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 밖에 없다는 점을 신조로 여기고있다. 98년 타계한 최종현 SK회장은 10년 앞을 내다보며 경영을 해온 기업인이다. 93년 전경련회장 취임직후 쌀 시장 개방의 불가피성을 거론해 파문을 일으켰으나 결국은 그의 말대로 됐다. 항상 미래를 예측하며 현재를 준비해온 기업인으로 꼽힌다. 44세때인 73년 창업주인 맏형 최종건 회장이 갑자기 타계하자 경영권을이어받은 그는 SK를 5대 기업의 대열에 들어서게 했다. 특히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 국제경쟁력을 키운 것은 그의 성과로 기록된다. 조중훈 한진 회장은 육-해-공에서 국내 최대 종합수송기업을 일궈낸 기업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한달에 30엔을 받으며 조선소 견습공으로일했고 이때 배운 기술을 토대로 수송분야 외길을 걸어왔다. 항공과 해운분야는 세계 10위권에 올려놓았고 특히 태평양 항고에서는 세계1~2위를 다투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일찌감치 업종 전문화를 통해 국제 경쟁력을 키워온 것이다. 조 회장은 민간 외교에도 적극 나서 프랑스 몽골 일본 중국 베트남 중동지역 국가들과의 경협확대를 통한 민간 외교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김성곤 쌍용 창업자는 보성전문학교 졸업후 대구상공은행에 근무했으나적성에 맞지 않아 이내 그만두고 비누공장을 인수, 삼공유지를 경영했다. 이 회사가 쌍용의 모체다. 그는 은행경험을 살려 쌍용화재를 출범시키고 금성방직과 무역업체인 (주)쌍용 쌍용양회 등을 잇따라 발족시키며 사세를 키웠다. 기업인이면서도 육영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국민학원과 구암학원을 인수, 인재를 양성했다. 국가나 사회발전을 위해선 인간에 대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는 철학때문이었다. 신격호 롯데 회장 역시 도전정신으로 가득찬 기업인이다. 경남 울산의 가난한 집 10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기위해 가출, 19세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수중에 있던 돈은 시골면서기의 두달치 월급인 83원. 우유와 신물배달 공장의 시간제근무 등 닥치는대로 일했다. 미군들이 껌을 씹는 것을 보고 이 사업에 진출했으나 미군기의 공습으로폭격받아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재기하는데 성공, 지금은 한국과 일본에 거대기업군을일궜다. 요즘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경영을 챙기는 그는 "기업은 자율경쟁을 통해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이를 실천해오고 있다. 박태준 전 포철회장은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오늘의 포철을 일군 원동력이었다며 그의 업적을평가절하하는 견해도 있으나 허허벌판에 말뚝을 박고 고로를 세워 세계적인철강회사를 키워낸 주역이 그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카네기가 20세기초 연산 1천만톤규모의 회사로 철강왕이 됐다면 그는 20여년만에 2천1백만톤의 철강회사를 만든 새로운 철강왕으로 불릴만 하다. 김향수 아남 명예회장은 반도체 전자분야의 외길을 걷고 있다. 반도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기인 68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반도체공장을건립, 이 사업에 나섰다. 아남이 세계 최대 반도체패키징업체로 도약한 것은 이때 씨앗이 뿌려진 것. 유인한 유한양행 창업자는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뒤 1926년 연희전문하교교수로 초빙받았으나 막상 귀국해서는 기업인의 길을 걸었따. 인류의 3대공정은 무지 기아 질병이라며 이중 질병퇴치에 힘쓰게 된다. 자신의 이름을 일성에서 일한으로 고칠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던 그는현대적 의미의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설립, 각종 치료제를 공급해왔다. 타계하면서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 신선한 충격을 줬으며 딸인 유재라씨역시 작고하면서 전재산을 유한재단에 기증, 2대에 걸쳐 귀감이 됐다. 이종근 종근당 창업자는 제약 외길을 걸어온 기업인. 인기품목인 드링크류 생산을 외면하고 원료의약품 개발에 매진해왔다. 창업후 50여년동안 개발한 원료의약품은 약 2백종에 이른다. 생명에 대한 외경을 바탕으로 질병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사업을해온 것이다. 임대홍 미원 창업자는 56년 부산에서 미원의 전신인 동아화성공업을 창립,재계에 발을 들여놨다. 이후 조미료분야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기업을 기워왔다. ''미원=조미료''로 인식될 정도로 인지도를 높였다. 삼성이 미풍이라는 브랜드로 도전했다가 끝내 고지를 탈환하지 못한 얘기는유명하다. 이희건 신한은행 회장은 금융계의 거목으로 꼽히는 재일교포 금융인이다. 오사카에서 금융업으로 대성한뒤 한국에 신한은행을 창업했다. 신한은행은 선진금융기법으로 우량은행으로 성장했다. 일본에선 재일한국인 신용조합협회장과 일본신용협동조합중 최대규모인간사이고깅 회장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신용호 교보생명창업자는 교육보험제도를 세계에서 첫 창안, 세계보험총회에서 대상을 받는 등 이 분야의 개척자다. 58년 교보생명을 설립, 생명보험업계를 이끌어왔다. 정도경영과 내실경영을 실천해왔다. 최태섭 한국유리 창업자는 57년 한국유리를 설립한 이후 평생을 유리 외길에바쳤다. 판유리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을 만든 것도 이같은 전문화에서 비롯된 것. 기독교정신에 입각해 경영해온 그는 기업은 하느님의 것이고 인간은 단지관리만 맡은 청지기라는 철학을 갖고 실천해왔다. 최종환 삼환기업 명예회장은 46년 삼환기업을 창업하고 미군발주공사에주력, 선진경영기법을 익혔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건설업체로서는 처음으로 중동에 진출, 오일달러를벌어들이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김철호 기아 창업자는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뒤 도일, 오사카에 있는 철공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한 뒤 귀국, 44년에 기아의 전신인 경성정공을설립한다. 이어 자전거와 3륜차 공장을 건설했다. 3륜차인 기아마스타는 60년대말부터 전국을 누빈 수송의 주역. 73년에는 대단위 종합자동차공장인 소하리 공장을 준공했다. 김용완 전 경방회장은 경방을 국내 굴지의 방직업체로 키운 경영인. 처남인 인촌 김성수씨 등이 설립한 경방의 사장과 회장을 맡아 섬유산업을이끌었고 전경련회장을 여섯번이나 맡아 재계의 얼굴 역할을 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