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메가트렌드] (대담) '(6) 한국의 새로운 경제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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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새로운 경제 개발 모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기존의 틀로는 현재의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도, 새로운 시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수도 없다는 지적이다. 동아시아 경제에 관한 세계적 석학인 미국 하버드대 정치경제학과 드와이트퍼킨스 교수는 "한국으로서는 향후 2,3년이 결정적인 시기"라고 지적하고 "이 기간에 한국이 새로운 경제발전 패러다임을 마련할 때"라고 말한다. 그는 또 "빅딜 등 정부의 지나친 경제개입은 우려할 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유장희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이 그를 만나 "한국형 경제모델의 고찰"을 주제로 신춘 대담을 가졌다. ======================================================================= 유장희 원장 =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사는 "정부주도"와 "대기업중심"으로 요약된다. 정부는 수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한편 철저한 국내 시장 보호 정책을 펼쳐 왔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대기업이 경제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해왔다. 한국의 발전모델이 70~80년대까지 유효했다는데 이견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한국의 발전 모델을 전면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있다. 드와이트 퍼킨스 박사 =세계 경제 환경이 급변한 만큼 지금까지 한국이추진해온 경제정책은 상당부분 효용성을 상실했다고 본다. 구식 모델을 과감히 용도폐기할 시점에 이르렀다. 97년말 한국이 금융위기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던 것도 시대착오적인 경제정책에서 비롯됐다.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조를 요청해야만 했던 것은 분명 불명예였지만 이는 경제모델 전반을 개혁해야 한다는 경종을 울린 것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IMF 구제금융은 일종의 축복일 수도 있었다고 본다. 유 원장 =과거 30년간 정부 주도 경제정책은 기간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있었다. 60~70년대에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수출드라이브와 국내 산업 보호가 주가되었다면 80년대는 정부 주도가 약간 완화되는 대신 수출 드라이브와 국내 시장 보호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90년대는 재벌 위주의 수출 드라이브와 해외 진출을 내걸고 정부와 재벌이협력 형식을 취해 왔다. 퍼킨스 박사 =70년대만 해도 한국의 정부 주도형 경제 개발 모델은 효율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경제계는 청와대라는 작전본부가 기획하는 대로 움직였다. 박정희 정부가 가장 관심을 둔 부문은 중화학 분야였던 것으로 안다. 정부 정책에 따르는 재벌들엔 다양한 혜택이 주어졌고 인프라스트럭처를 저렴한 비용에 이용할 수도 있었다. 특히 자본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지원됐다. 관치금융체제에서 기업들은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경영자금을 싼값에 끌어다썼다. 정부의 비호 아래 재벌은 급속히 자라났고 고속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제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유 원장 =그런 점에서 볼때 경제 성장에서 정부주도나 재벌의 역할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90년대를 전후로 세계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급류속으로 진입했다. 한국은 이 시대적 변화에 맞춰 변신하지 못했던 것이 실수다. 획기적인 산업구조 개편이 진작에 이뤄졌어야 하는데 정부와 기업이 이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퍼킨스 박사 =뿌리깊은 정경유착속에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것도 한국경제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았다. 사실 박정희식 경제모델이 모든 이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친재벌 성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전 대통령의 경제자문관이었던 고 김재익 경제수석이 한국에서 손꼽히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자였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그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금융실명제나 개방정책 등에서 나타나듯 그는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는데 전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재벌과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 70년대 중화학 산업 육성정책은 과잉생산과 산업구조의 왜곡을 가져 왔다. 이때 잉태된 불균형은 80년대들어 산업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엄청난 위기를 몰고 왔다. 국가 경제 존립이 위험해진 상황에서 중화학 구조조정이 단행됐고 정부의 인위적인 경제개입이 두드러졌다. 그 와중에 정부에 엄청난 정치자금이 흘러들었고 부패도 덩달아 자라났다. 유 원장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자금을 모을 길이 마땅찮았다는 점도 정경유착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고 본다. 정치권도 손쉽게 수천억, 수조원의 정치자금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을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더욱 부패가 만연하게 됐고 펀더멘털이 뿌리째 흔들렸다. 퍼킨스 박사 =정경유착이 고착화되고 경제 구조가 왜곡되는 동안 안팎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경제구조 자체가 뒤바뀌었다. 갈수록 경제가 고도화됐고 현대화됐다. 더이상 정부가 마음먹은대로 경제 주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정부가 특정 경제 부문을 육성하겠다고 안간힘을 써봐야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경제주도권은 정부가 아닌 산업 프론티어들에게 옮겨갔다. 유 원장 =기술력이 지배하는 대경쟁 시대로 옮겨 갈수록 정부가 경제 통수권자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아까도 지적했지만 급한 불 끄기에 급급해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이 계속됐고 경제는 기초체력을 더욱 상실해 갔다. 퍼킨스 박사 =민주화도 경제 구도를 변화시키는데 한몫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생애를 민주화 운동에 바쳤던 인물이다. 과거의 정권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정치적인 측면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경제를 선진화시키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우선하면서 기업운영에 정치적인 정부개입이 더욱 늘었다. 부패도 자라났다. 결과적으로는 박정희 정권과 포스코의 관계나 김영삼 정권과 한보와의 관계나 경제를 왜곡시키기는 마찬가지였다. 유 원장 =그런 와중에 결정적으로 거시 경제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기업들의 해외 자금 조달 비용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외환보유고는 갈수록 고갈됐다. 정부는 그러나 이같은 문제를 사전에 깨닫지 못했다. 경제 구조가 취약해질대로 취약해진 상황에서 태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졌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처럼 한국 역시 위기가 닥치자 이를 견디지못하고 결국 국제사회에 구조요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퍼킨스 박사 =강경식 전 총리가 환란의 주범이라는 집중 포화를 받은 줄로 안다. 하지만 강경식 총리 개인이 한국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는 생각할수 없다. 국가 수뇌부 전반에서 환란의 씨앗을 키우고 있었다. 김영삼 전대통령 시절 내각이 얼마나 자주 교체됐는지를 생각해 보자. 10개월에 한번씩은 장관이 갈리곤 했다. 미국 언론에서는 당시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청사의 화장실이 어디인지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목이 달아난다"는 뼈있는 농담을 하곤했다. 유 원장 =IMF의 구제금융 사태에 이르고서야 경제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절박한 경각심이 일었다. 금융개혁에도 발동이 걸렸다. 관치 금융은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큰 문제거리였다. 한국의 재벌구도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재벌을 심사.평가.선도할 장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금융기관도 그 자체가 워낙 취약했던 만큼 선진국처럼 금융계가 기업의건전성이나 신용을 평가하는 기능을 담당하지 못했다. 오랜동안 관치 금융 관행에 젖어온 금융기관들은 담보나 챙기는 식의 안이한 경영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퍼킨스 박사 =맞는 말이다.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서 금융개혁을 비롯한 경제개혁의 고삐를 바짝 당길 수 있던 것도 IMF라는 자극이 맞물려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에서 금융시장의 비중이 날로 중대해진 요즘에는 외부 충격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탄탄한 금융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급선무다. 유 원장 =현재 한국은 금융개혁이 어느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재벌의 경쟁력 제고에 역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 또 승산있는 분야를 특화해 육성하고 유능한 인재 위주로 조직을 개편하는 등의 조치가 동시에 이뤄져야 할 것이다. 퍼킨스 박사 =아이러니컬한 것은 김대중 정부가 시장경제와 개방을 외치며 외국자본 유치에 힘쓰고 있는 반면 경제개입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재벌 정책에선 더욱 그러하다. 기업간 빅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강압적인 측면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그같은 과정을 지켜볼때는 몇가지 의문이 앞선다. 지금과 같이 글로벌화된 경제환경 하에서 정부가 과연 경제 구도를 조직하고 관리하고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물론 한국의 경제개혁이 아직 진행중인 만큼 그 결과를 예단하긴 이르다. 하지만 일견 염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유 원장 =사실 국가 경쟁력 제고와 산업구조 개편은 IMF 한파를 겪고 있는 한국만의 과제는 아니다. 미국이 정보 통신 생명공학 우주공학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면 독일은 화학의약 전자분야를 키우는데 주력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대만이 물류 부품 통신 교통에, 싱가포르는 금융 통신 정보 전자등 산업 특화 전략을 내걸고 국가 산업조정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한국역시 IMF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경제 모델을 창출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퍼킨스 박사 =한국의 경제위기가 오래 지속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1~2년뒤면 위기를 털고 빠르게 회복될 것으로 본다. 정작 문제는 그 이후다. 유념해야 할 것은 기업 경쟁이 더욱 치열해 지리라는 점이다. 은행에서 마구잡이로 여신을 끌어쓸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과도한 차입경영으로 기업이 쓰러진다고 해도 정부가 구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리더십과 새로운 경쟁력을 갖추는 일이 한국의 과제라고 본다. 유 원장 =동감이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경제 또한 광역화될 것이다. 산업은 경박단소화 정보화 지식 집약화 등의 물결속에 놀라운 속도로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같은 선발 개도국들은 과거의 모델을 과감히 버리고 "산업혁명"을 도모한다는 자세로 구조개혁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은 인적자원이 우수하고 국민들의 성취욕이 높은만큼 분명히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본다. 퍼킨스 박사 =앞으로 2-3년간이 한국엔 상당히 중요한 기간이다. 한국이 21세기형 발전모델을 정립해 새로운 도약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발개도국으로 모범을 보여 주길 기대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