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건축실명제

현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제(1887~1965)가 설계한 사보아주택은 59년 봄 프랑스 파리 근교 프와 시의회에 의해 신설고등학교 부지로 결정됐다. 그러나 각계의 항의가 빗발치자 드골정부는 계획을 취소하고 수만달러를 들여 주택을 보수했다. 파리에 코르뷔제의 작품이 14채나 남아있는 것은 유명건축물에 대한 프랑스정부와 국민의 이같은 애정 덕분이다. 프랑스사람들은 또 이들 건물 앞에 "르 코르뷔제의 작품"이라는 안내판을 설치해 관광자원화하고 있다. 가까운 태국에서만 하더라도 가이드가 관광지 건물을 소개할 때 "누가 언제 설계했고 특징은 무엇인지" 알려준다. 건축문외한도 관광안내자가 이름을 외울 정도면 뭔가 다르겠구나라는 생각에상세히 살펴보게 된다. 자국 건축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엿보게 하는 대목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건설대국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건축문화에 대한 일반의인식은 희박하기 짝이 없다. 국회의사당과 세종문화회관같은 공공건물은 물론 6.3빌딩같은 유명건물의 설계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건축주와 시공사 중심의 관행이 설계자의 몫을 인정하지 않은 때문이다. 올해는 정부가 정한 건축문화의 해다. ''99 건축문화의 해''를 맞아 조직위가 세운 사업계획을 보면 밀레니엄기념조형물과 건축문화자료관 건립, 건축박람회와 한국근현대건축1백년전 개최와 함께 건축문화자산 개발및 관광사업화 등이 들어 있다. 건축문화자산의 관광자원화를 위해 전국의 건축자산과 역사적 장소를 조사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포도를 작성하리라 한다. 탐방이나 기행을 통해 우리의 건축문화를 이해시킨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하면 된다 싶어 반갑다. 문제는 계획이 아니라 실천이다. 96년 옛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시 발견된 정초석 수장물에 새겨진 건축관계자들의 이름이 일제시대 건물이 후에 지어진 것보다 더 튼튼하다는 말의 근거를되새기게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일각에서 건물에 설계자의 이름을 써붙이는 건축문패 달아주기운동을 벌인다고 하거니와 명실상부한 건축실명제가 실시돼 누구나 좋고 나쁜건축을 판별할 수 있게 돼야 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건축물은 공공성과 역사성을 띤다는데 주목하는 건축주와 건축가가 늘어나도록 만드는 일이 조형물 건립보다 우선이다. 기록을 싫어하는 관행은 책임회피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록의 무게에 대한 두려움을 심는 일이야말로 내일을 위한 참된 건축문화 정립의 초석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