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한자병용과 어문정책

어문정책은 국가체제나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것과 맞먹는 작업이라고 한다. 한때 라틴어 사용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유럽에서는 정책적 결정을 포기하고 라틴어 사용여부를 아예 교육시장에 맡겨버렸다. 프랑스에서도 "프랑스어법"이라는 어문규정법을 만들어 97년에 국회를 통과시켰으나 시비가 그치지않고 있다. 그만큼 어문정책을 세우고 시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우리나라에도 한글전용과 한자혼용 논란이 계속돼왔다. 정부가 한글전용 방침을 공표한 이후에도 한자혼용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논란이 그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양측 모두 어느정도 논리의 타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전용의 편리성과 한자혼용의 당위성중 어느 한쪽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한글이나 한자사용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고 있을 정도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선택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문화관광부가 9일 발표한 어문정책의 내용은 48년 공표한 "한글을 전용하되 한자는 필요한 곳에만 쓴다"는 한글전용 대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한자어에 대해 한자를 병용함으로써 불편을 막자는 내용이다. 문화부는 이번 정책이 한자병용이지 혼용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화부의 설명과는 달리 일반 국민들은 이번 발표가 정부 어문정책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글전용의 근간을 건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입장이 한글전용인가, 한자혼용인가의 여부가 아니다. 문제는 정부의 입장을 밝히기에 앞서 학계나 일반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절차가 생략된데 있다. 물론 문화부는 충분한 연구와 논의를 거쳐 발표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지난 8일 열린 국어심의회에서조차 의견의 일치가 없었다. 9일 오전 국무회의에서도 논란이 벌어졌다는 전언이다. 비록 학계에서 충분히 논의된 사항이라 해도 정부가 직접 정책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명분축적과 사전 공감대 형성이 요구된다. 문화정책은 일반 경제.사회정책처럼 예산이 뒷받침되고 전문가집단에서 논의됐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어문정책, 그 중에서도 한글전용같은 민감한 정책에 대해선 일반 국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 문화부의 이번 한글한자병용정책 발표과정은 한마디로 비문화적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