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색채 성장소설..현기영씨 새장편 '지상에 숟가락...'

중견작가 현기영(58)씨가 10년만에 새 장편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를 내놓았다. 자전적 성격을 띤 이 작품에서 그는 유년시절의 추억과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소설의 밑그림은 막막한 바다에 갇혀 외로움을 삭이던 섬 소년이 어엿한 문학청년으로 커가는 과정이다. 그 위에 비극적인 가족사와 4.3사건 한국전쟁 등 슬픔의 무늬들이 겹쳐진다. 역사의 행간에 감춰져 있던 한 작가의 성장기록은 담담하면서도 애잔하게 읽힌다. 그의 회상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질곡의 시대를 견뎌온 아버지에게 죽음은 "실패자가 쟁취한 최후의 승리"다. 뱀을 영감이라고 부르던 증조할아버지와 살쾡이를 무서워했던 나의 어린시절도 어둡기는 마찬가지. 4.3사태때 오름봉우리에 오르던 봉앳불(봉화)과 토벌대가 마을에 지른 방앳불(방화)은 아직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다. 허기져 드러누운 어머니에게 "약으로 써라"며 외할아버지가 보내준 돼지고기한 근은 또 얼마나 가슴 아린 기억인가.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약이 있을까. 작품 속에는 그의 글쓰기에 얽힌 이야기도 들어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원"지의 고교생들 작품을 흉내내어 써 본 "어머니와 어머니"가 그의 첫 소설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수업은 아버지를 향한 7년간의 편지쓰기에서 비롯됐다. 아버지는 늘 부재중이었으며 또한 투쟁의 대상이었다. 광활한 수평선마저 올가미처럼 그를 옭죄었다. 그런 그에게 문학과 독서는 유일한 출구였다. "문학을 신봉하기 시작하면서 이상이나 카뮈 등을 내 식구보다 더 가까운 혈연처럼 생각했고 그들이 가르친 파격 반항 불성실 같은 것들을 금과옥조로 삼았지요" 그것은 곧 "아프면서 크는" 성장과정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얼굴이 점점 아버지의 영정을 닮아가고 날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귀향연습"을 한다. 그는 작품 말미에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고 썼다. 그 고백처럼 "영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모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도정"에 그는 지금 서 있는 것이다. "인간성장의 방정식에는 변수와 항수가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