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화백의 '통일무' 한판 .. 가나아트센터서 '10주기전'

고암 이응노화백의 회고전 개막일이었던 지난 89년 1월 10일. 전시장소인 호암갤러리로 비보가 날아들었다. 고암이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는 소식이었다. 국내 미술계가 충격에 빠졌다. "동백림 사건"으로 "금기작가"의 멍에를 쓴채 2년반동안 옥고를 치른후 한을 안고 살아가다가 끝내 남한땅을 밟아보지 못한채 영면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이는 86세. 굴곡 많은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끝없는 정열로 예술혼을 불태운 고암은 수천점의 작품을 남기고 파리의 한 시립묘지에 묻혔다. 그후 10년. "고암 이응노 10주기전"이 4월2일부터 22일까지 서울 가나아트센터(720-1020)와 조선일보미술관(724-6314)에서 동시에 열린다. 주제는 "통일무". 초기의 묵죽화에서부터 산수 수묵추상 종이콜라쥬 문자추상 말년의 인간연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력(화력)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1백40여점이 나온다. 출품작은 그동안 국내에서 소개되지 않았던 것으로 모두 파리에서 들여왔다. 부인 박인경씨와 아들 이융세씨의 작품 각 5점, 고암이 파리에 세운 동양미술학교 제자들의 작품 30여점도 함께 소개된다.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은 해강 김규진 선생의 문하에서 묵죽을 배웠다. 35년-45년 일본에 머물며 일본화풍과 서양화풍을 두루 섭렵했다. 1958년 그는 55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 수묵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 조형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구, 유럽화단에서 독보적 위치를 확보했다. 67년의 동백림사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80년대 들어선 "인간" 연작을 발표하며 유럽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등지로 활동무대를 넓혀가면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생활주변의 모든 사물을 작품에 활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분지에서부터 화선지 나무 철 돌 가죽 공책 광고지 신문지 광목 비닐 포대노끈에 이르기까지 여러 재료를 사용했다. 채색도 먹은 물론 유화 아크릴 수채 커피 간장 등을 썼다. 감옥에서도 밥풀을 짓이겨 작업을 했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정열은 대단했다. 이번 10주기전은 그의 조형세계를 재조명하려는 취지로 마련됐다. 가나아트센터에는 인간연작 60여점과 입체작품 20여점, 유족과 제자들의 작품 40여점을 전시한다. 조선일보미술관에는 도불이전과 이후를 포함한 전시기의 작품 60여점이 걸린다. 입장료는 대인 2천원,소인 1천원.한번 사면 두 전시장 모두 들어갈 수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