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44) '물가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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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가안정 대책 ] 63년 초는 혼란스러웠다.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일시에 분출된 양상을 보였다. 경제계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바로 전해 6월 10일 군사정부가 불쑥 저질러 놓은 통화개혁조치의 후유증이 연초부터 물가에서 난폭하게 나타났다. 어떤 품목의 경우는 10배 가량 값이 뛰었다. 화폐개혁 전의 화폐 수준까지 육박할 정도였다. 사업이 될리가 없었다. 기업인들은 공장 건설은 물론 원자재 구입, 노임지급 등이 어려워지자 손을 놓은 상태였다. 살인적인 물가고로 서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경제인협회는 1월 28일 오전 긴급 회원 간담회를 열었다. 점심까지 걸러가면서 물가안정 대책을 논의했다. 그런데 이 비공개회의 내용이 외부로 새 나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날 오후 모 석간신문은 1면 톱기사에 "물가상승은 정책미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정 불가피"라는 헤드라인을 뽑아 대서특필했다. 정부는 펄쩍 뛰었다. 협회도 이 기사에 깜짝 놀랐다. 물가정책담당자인 최고회의 유양수 재경위원장은 즉각 이정림회장에게 해명하고 책임지라며 오후 6시께 항의 전화를 했다. 경제인협회는 이튿날 아침 긴급이사회를 소집했다. 군사정부가 유일한 등불이라고 믿고 있는 "5개년 계획" 수정을 운운했으니 비상이 걸린 것이다. 한편 유양수 위원장도 기자회견을 갖고 진화에 나섰다. 그런데 이 해명을 위한 기자회견은 물가논쟁을 더 확대, 악화시키는 도화선을 제공했다. 이런 사연에는 이남용(당시 산업경제신문 소속)이라는 고참 기자의 장난기 어린 농간(?)이 곁들어졌다. 그는 5.16 직후 장도영을 스탈린에 빗대어 "장탈린", 박정희는 당시 소련 서기장 마렌코프에 비유하여 "박코프"라고 비하했던 인물. 도하신문은 얼씨구나하고 이를 가십에 실었다. 이남용씨는 이 건으로 구금되기도 했었다. 그가 또 한 번 파문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회견장에서 오간 간단한 문답이 사단이 됐다. "지금의 물가폭등은 부정축재자들의 농간이라고 항간에서는 야단들인데..."(이남용) "그렇다면 곧 조사시켜 진상을 밝혀야지"(유양수) 이남용씨는 그날 오후 석간에 "부정축재자 물가폭등 조작" "환수금을 국민부담으로 전가시키기 위해 물가를 조작하고 있다"는 내용을 거침없이 써댔다. 사실인즉 그동안 5.16 군사정부의 통제 때문에 숨도 못쉬고 있던 신문들이 경제인협회와 정부간의 물가논쟁을 기화로 그때까지의 울분을 일시에 토해낸 것이었다. 이유야 어떻게 됐건 경제인협회는 발칵 뒤집혔다.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1월31일 긴급이사회를 소집했다. 이사회에서 나온 불평은 한마디로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협회회원 약 60명 중 소위 부정축재법에 연루된 사람은 고작 10명인데다 이들이 생산하는 제품의 가격은 보합 내지 오히려 약간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유양수 위원장 발언(적어도 신문에 보도된 바로는)은 물가폭등을 경제인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으니,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협회는 이에따라 이정림회장을 포함한 대책위원 9인을 뽑아 김현철 내각수반과 유양수 위원장을 우선 방문키로 했다. 중앙청 내각수반실에서 열린 김 수반과의 면담광경은 웬일인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 수반은 이에 앞서 이해 1월8일 박 의장과의 신년간친회, 그리고 1월16일 "경제기술조사센터"(현 한국경제연구원) 발족식에도 참석해 내용있는 축사를 해 협회와는 원만한 사이였다. 김 수반은 협회대표들이 쏟아붓는 이야기를 몸하나 흩트리지 않고 참을성있게 들었다. 그런 다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벌 하나와 정부가 싸워도 정부는 패퇴하는 것입니다.그런데 한국 재벌들이 똘똘뭉쳐 지금 정부와 싸우려고 하니, 정부는 대항도 못하고 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싸우려고 하니 정부도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듣고만 있었는데 어안이 벙벙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각수반께서, 아니 이 영감이 크게 오해하고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으로 그때 처음 "재벌"이라는 용어를 공식석상에서 들었다. 협회가 군사정부에 싸움을 걸어왔다는 말을 듣곤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더욱이 재벌과 정부가 싸우면 정부가 필시 패할 것이라는데는 더더욱 놀랐다. "이분이 일본의 쇼와 초기 미쓰이, 미쓰비시 양대 재벌이 정계를 좌지우지할 때를 연상하고 있지는 않나"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유양수 재경위원장을 만나니 "내가 기자의 유도질문에 걸려 그렇다면 조사해볼 수도 있다고 한 말이 와전된 것이니 피차 오해를 풀자"고 솔직히 이야기 했다. 그리고 경제인협회 대표들이 박정희 의장과 함께 의견을 교환하는 기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다음날인 2월 1일 오전 박정희 의장 "임석"하에 관계 최고위원, 정부각료 등과 협회대표들은 문자그대로 흉금을 터놓고 5개년 계획추진 등에 대해 토의했다. 박 의장은 "정부나 경제계나 나라발전을 위한 같은 배를 탄 만큼 화합 협력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또 "오늘과 같은 격의없는 의견교환을 위해 매월 1회 관.민합동회의를 갖자"고 결론지었다. 이는 후일 청와대 무역확대회의로 개편돼 계속 이어졌다. 참으로 바빴던 닷새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