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노조 농성 서울대 경찰진입] 자진 해산 '압박'

시울지하철 노조원들이 농성중이던 서울대에 전격적으로 경찰병력이 진입했다. 당초 지하철 노조원들에게 밝혔던 복귀시한인 26일이후에나 경찰력을 투입할것으로 예상했었으나 의외로 빨리 이루어졌다. 경찰은 특히 종전과는 달리 진입초기에 상황을 완전제압하겠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1차 진입시도에서 저항을 받자 40여분 만에 정문 밖으로 물러나와 "자진 해산"을 종용했다. 밤새 여러차례 공방전이 이어지며 서울대에서 농성중이던 지하철 노조는 대부분 해산됐다. 정부가 이같이 강경진압에 나서자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지하철노조 지도부는 "결사 항전"을 선언하는 등 더욱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맞섰다. 노조는 "정부가 대화를 기피하고 공권력을 사용하고 나선 이상 노조도 투쟁으로 항거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노조는 경찰력 진입에 노조원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분위기를 잡으며 항전을 독려하는 모습이었다. 서울대 경찰진입 =25일 경찰의 해산작전은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전개됐다. 지상경찰병력은 오후 7시35분께 서울대 정문에 전격 투입됐다. 1시간전부터 대열을 갖췄던 20개 중대 2천여명은 작전명령이 떨어지는 동시에 정문으로 돌진했다. 서울대에서 노조원과 한총련소속 시위대들이 농성을 벌인 지 일주일만이다. 경찰투입 10여분후 서울대 후문쪽에서 진입을 시도한 경찰은 교내기숙사 3거리까지 2백여m가량 진입했다. 저항이 심했던 정문에서도 15분여만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한총련 소속 시위대를 돌파, 교내로 진입했다. 정문과 후문을 통과한 경찰은 교내에 있던 한총련 소속 대학생 8백여명과 노조원 1천여명을 학생회관으로 밀어냈다. 경찰병력은 후문과 정문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무장한2백여명의 시위대와 맞붙었다. 시위중이던 노조원들은 대학생과 합세해 화염병을 던지며 대항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저항이 격렬해지자 최루탄을 쏘아댔다. 경찰에 밀린 노조원과 학생들은 도서관 6층 대학원 열람실을 점거, 장기농성태세를 갖췄다. 경찰은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40분만에 다시 정문 밖으로 물러 나왔다. 경찰병력은 초기에 농성자들을 해산하기 보다는 자진해산을 유도한다는 차원에서 심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시위과정에서 노조원들을 일부 검거해 분리시켰다. 노조 대응 =서울대에 대한 경찰력 투입이 알려지자 명동성당은 순식간에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갑용 민주노총 위원장 등 지도부는 즉각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대응방안을 논의했으며 노조간부들은 노조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도부는 정부의 공권력 투입이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진데 대해 당황해하면서도 서울대를 빠져나간 노조원들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갑용 위원장은 "정부가 서울대를 떠난 노조원들이 복귀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며 "공권력 투입과 관계없이 26일 한국통신, 27일 금속연맹 파업을 예정대로 강행하겠다"고 말했다. 석치순 지하철노조위원장도 "정부가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극한적인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돌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사수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성당입구에서 무장시위를 계속해 명동성당은 이날 새벽까지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다. 민주노총 정성희 대외협력실장은 "김대중 정부과 과거 정부와 다르지 않다는것이 입증됐다"며 "앞으로 김대중 정권 퇴진운동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