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차이나타운

한국에 화교가 처음 들어 온 것은 1882년으로 추정된다. 임오군란때 한국에 파견된 오장경의 군대를 따라 40여명의 군역화상이 함께 입국했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가 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중국은 바로 그해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어 강압적으로 화교가 거주할 수 있는 길을 터 놓았다. 중화민국 한국연구학회가 1983년 간행한 "여한60년견문록"을 보면 1883년 서울 인천 등에는 이미 3백20여명의 화교가 살고 있었고 이듬해인 1884년에는"화상조계지"가 설치됨에 따라 6백여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은 서울서는 오늘날의 중구 수표동 관수동 북창동 일대에 모여 살았고 인천에서는 선린동 북성동 일대에 거주했다. 이미 1883년 "청상회관"을 서울 명동에 신축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서울 인천에 이어 1887년 부산, 1889년 원산에 화상조계지가 설치되자 화교는 서울서 3천명, 인천서 1천명을 넘어서기 시작하다가 청일전쟁뒤 주춤해졌다. 1920년대부터는 중국내의 정치적 혼란에 따라 다시 막노동자들인 "쿨리"가 한국에도 몰려들기 시작한다. 한 때는 전국에 3만여명이 흩어져 살았다. "짱꼴로"라는 말도 그때 생겼다. 그들은 황무지를 싼값에 사거나 개간해 채소류를 가꾸어 팔았다. 지금의 이화여대 근처인 대현동 일대는 모두 그들 차지였다. 당시 한국의 언론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한 적도 있다. 농사짓는 쿨리는 인천에 더 많았다. 중일전쟁후엔 1937년 무렵에는 5만6천여명의 인천인구 가운데 화교가 1만여명에 달했다. 한 때 청관으로 불리며 흥청거렸던 인천 선린~북성동 거리는 지금 1백세대 6백여명의 화교들만이 썰렁한 거리를 지키고 있다. 60년대 "외국인토지거래금지법" 등 잇따른 경제조치로 대부분 대만 미국 중국 등으로 떠나버린 탓이다. 최근 인천시의 차이나타운 개발사업에 대만 홍콩의 화교들이 인천 "차이나타운" 개발사업에 투자를 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이 거리가 옛 영화를 되찾아 다시 관광명소가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