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저널] '사마귀의 앞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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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랑지부는 사마귀의 도끼처럼 넓적한 앞다리를 말한다. 흔히 어마어마한 힘의 차이를 가진 강적 앞에 스스로의 보잘 것 없는 앞다리를 믿고 분수없이 날뛰는 사람을 일컬어 쓰는 표현이다. 코소보사태가 수습단계에 이른 요즈음 슬로보단 밀레소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야 말로 당랑지부의 표본이었다는 평가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같은 독재자로 인해 희생당하는 것은 국민이다. 발전소 정유소 저유소는 물론 물 다리 도로 건물 등 모든 민생 인프라가 공습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서해도발을 계속하며 속된말로 세계의 ''왕따''가 된 북한도 똑같은 맥락에서 당랑지부의 집단이기는 마찬가지라는데 우리 나름대로의 속앓이가 있다. 밀레소비치가 권좌에 앉아있는 한 전후복구비는 단돈 1센트도 내놓을 수 없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고 보면 2차대전 후 미국이 내놓은 마샬 플랜같은 것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북한에 지원되는 식량이 군량미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인도주의적지원에도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미하원 벤자민 길만 국제관계위원장의 표현은 대상만 달리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독재자 한사람을 잘못 만남으로서 그 국민이 지고 가야 할 업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읽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밀레소비치가 백만에 가까운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을 처참한 곤궁으로 밀어넣은 것은 인도주의에 대한 명약관화한 배신이고 범죄행위임에 틀림없다. 이 사실 앞에 그를 두둔할 수 있는 근거는 모두 없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죄없는 일반 유고슬라비아 국민들까지 무조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 라디오 쇼에 나온 세르비아계 미국인은 코소보에 사는 알바니아계 사람들은 유고정부와 세르비아계인들의 세금으로 제공되는 주거 교육 그리고 직장에서 자기 몫만 챙기려 들 뿐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코소보사태를 단순한 형태의 인종청소로 규정짓는 것은 서방 미디어제국주의의 편견일 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만약 알바니아인들이 보다 생활여건이 좋은 미국으로 밀입국, 미국의 국기를 흔든다면 미국은 어떻게 대응했을 것인가하고 묻고 있다. 유고인들은 한발 더 나아가 신국제질서의 틀속에서 코소보와 맥을 같이하는 티모르, 쿠루드 그리고 티베트 등은 어떻게 조명되어야 할 것인가 묻고 있기도 하다. 철군협정이 맺어지자 빌 클린턴대통령은 지난주 코소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선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독수리떼가 발칸반도의 생쥐 한 마리를 놓고 오래 지워지지 않을 불장난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곳 만평가들이 그리는 삽화다. 독수리는 미친 생쥐에게 물릴까봐 땅에는 단 한번도 내려앉은 적이 없다. 그저 저격병이 망원렌즈로 목표물을 찾아 등을 겨누어 쏘듯 비겁한(?) 공습만 계속한 전쟁놀이에 불과했다는 게 이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코소보 전쟁을 놓고 경제인들은 변비에 걸렸던 미국군수산업이 일거에 군수품 재고정리를 할 수 있었던 보기 드문 기회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무기성능차원에서 거론된 얘기지만, 코소보전쟁은 아파치헬기의 실력을 백일하에 드러내 준 전쟁터였다는 평가도 있었다. 밀레소비치의 탱크를 궤멸시킬 가공할 무기로 선전됐던 아파치는 전쟁중 단 한번도 코소보에 들어가보지 못했다. 그저 몸풀다 허리부러진(추락사고) 선수처럼 전쟁이 끝나고 유고의 방공망위협이 해소된 후에야 마치 가장 큰 공을 세운 전위대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곳 군사전문가들의 평가다. 코소보전쟁이 한국인들에게 남긴 교훈 또한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우리가 아직까지 유럽문제에 둔감한 우물안개구리들이라는 것을 부각시켜준 계기였다는 점이다. 세계신문이 연일 코소보사태를 머리기사로 올리고 있는 상황속에서도 우리의 관심은 옷로비 사건 등 우리 스스로의 치부들추기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후세가 어떻게 평가할 지 궁금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