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벤처정책의 새 패러다임 .. 배종태 <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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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태 전세계에서 실리콘밸리를 본뜨려고 애쓰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실리콘밸리뿐인 듯하다. 지구 곳곳에서 실리콘밸리의 이름과 형태를 모방한 많은 단지가 세워졌다. 지금도 세워지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 실리콘밸리를 제대로 벤치마킹하려면 벤처정책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지난 97년 "벤처육성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벤처기업 키우기는 정부의 핵심시책중 하나가 됐다. 벤처정책의 홍수 속에서 올해 정부의 벤처관련 예산은 작년보다 27% 증가한 3천4백65억원에 달한다.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벤처정책 담당자들이나 벤처기업가들이 벤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벤처는 이제 시대적 조류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식돼야 한다. 벤처는 지금까지의 기업성장 방식이나 이윤창출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다. 때문에 벤처는 기업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다. 미래의 기업가치만 인정되면 현재 성과는 미미해도 자본시장에선 바로 기업의 현재가치(주가)가 평가된다. 벤처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벤처가 네트워크로 이뤄진 생태계(Habitat)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공단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벤처정책을 추진해선 안된다. 이제 생각을 바꾸자. 실리콘밸리의 성공요인도 101번 도로 주변에 흩어진 아담한 건물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탁월한 생태계에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지식집약도가 높은 지역인 실리콘밸리에는 우수한 대학,고급인력, 골드러시의 후예다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지역풍토, 첨단기술의 특성을 이해하는 벤처자본가, 벤처를 지원하는 여러 전문가 그룹 등이 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협력도 하고 경쟁도 한다. 이제 실리콘밸리를 모방하려면 철저히 하자. 즉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실리콘밸리의 알맹이를 배우자. 벤처기업가는 주어진 토양 속에서 씨를 뿌리고, 김을 매서 키우고, 때가 되면 수확해서 시장에 파는 농부와 같다. 정부가 농부(벤처기업가)를 도와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토양(생태계)을 좋게 하고, 농부를 도와 김을 매고 영농을 도와줄 전문가 그룹을 키우고, 농부가 곡식을 팔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농사를 잘 짓는 법을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해서, 농사는 농부가 자신의 노력으로 짓게 하는 것이다. 같은 토양이라 하더라도 시원찮은 싹들은 죽고, 튼실한 싹들만이 남아서 더욱 성장한다. 싹들간에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있다. 누가 도태될지 모르는 이러한 "부분의 불확실성"이 있어야 오히려 가장 우수한 것들만 살아 남아서 전체 농사가 확실하게 잘 된다. 가능성이 없는 벤처를 빨리 도태시키는 경쟁과 평가 매커니즘 없이 일정 조건만 만족시키면 무조건 벤처를 지원하는 것은, 사라져야 할 벤처를 연명하게 만든다. 그간 한국의 벤처정책은 기반조성 차원에서 시설투자, 자금집행 등에 치중하고 인재 육성이나 전문 서비스 지원 등 소프트웨어 인프라 확보노력은 미흡했다. 이제는 하드웨어 중심의 지원과 창업기업수 증가 등 양적 확대에 치우친 정책에서 탈피해 인력 기술 금융 경영, 기업간 네트워크, 제도 문화 등 소프트웨어 인프라를 키워야 한다. 벤처육성을 위한 정부의 역할도 이제는 경기자가 아닌 심판관으로 돌아가자. 지금까지는 국내 벤처 기반이 취약해 정부가 벤처 육성에 핵심멤버로 참여하고 개별기업을 밀착 지원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시장자율에 맡기고 부처별로 창의성을 발휘하여 벤처 생태계 및 시스템을 구축하는 간접지원방식으로 가야 한다. 벤처 생태계의 주역들인 벤처기업가, 엔젤과 벤처자본가, 벤처지원 전문인력의 육성은 시간은 걸리겠지만 꾸준히 노력해야 할 최우선 과제다. 특히 예비창업자 및 벤처기업가들에 대한 경영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벤처기업 인정심사 등에서 일정한 경영교육을 이수한 벤처기업가들에게 가점을 주는 방식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대기업 체제에 맞추어 기술된 기존의 경영학 교과서도 벤처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게 상당부분 고치거나 보완해야 한다. 우리에게 벤처는 여전히 희망이고 또 가능성도 있다. "고수익.고위험의 사업"인 벤처의 육성은 고수익 가능성이 있는 벤처를 선별하여 고위험을 줄일 수 있는 여러 제도나 인센티브를 모색하는 것이 요체임을 잊지 말자.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