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62) '한미...'

[ 한.미 경제교류 시작 ] 64년부터 일기 시작한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데모는 65년 6월에 이르러 박정희 정권 퇴진 운동으로 치닫는다. 박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대응한다. 이때의 긴급 상황을 "6.3사태"라고 한다. 당시에 데모에 참가한 이들을 6.3 세대라고 부른다. 학생들은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압제하에서 피어린 항쟁을 통해 쟁취한 해방 조국의 민족 자주성은 다시 제국주의적 일본 독점 자본주의 독아에 박살나기 한 걸음전에 있다" 한마디로 일본 제국주의의 진출 및 경제권 편입에 반대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와 같은 시국관과 국제감각을 가진 학생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자기들만이 애국자요 정의의 수호자라고 자부하는 이데올로기 소유자들을 설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의 십여명 가까운 학생이 내 사무실에 왔다. 개구일성 "대한제국이 왜 일본에 강점 당했지요" 거창한 질문에 대한 즉답은없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쇄국으로 국제정세에 깜깜했기 때문입니다.학생들의 성명서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을 알고 있습니다. 민족자주성 수호니 일본진출 반대니 하지만 결국 문을 열면 먹히니 문닫고 쇄국하자는 것이아닙니까" 이렇게 반문했다. 이번에는 학생들이 필자에게 물었다. "일본과 대응해 승산이 있습니까. 십중팔구 다시 일본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필자는 "먹힌다"는 젊은 학생들 말에 언성을 높인 것으로 지금도 기억난다. "어떻게 학생들은 먹힐 생각만 하고 먹을 생각을 못합니까... 나는 일본을 먹기 위해 아니면 따라잡기 위해 한.일국교를 하자는 것입니다. 적을 알고 정보를 얻어야 대응할 수 있지 않겠소" 이런 입씨름을 한 후 잠깐 숨을 돌려 계속 대화를 나눴다. "우리가 일본보다 앞선 때는 삼국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랬는지 아세요... 당시 선진국이라할 중국 즉 수 당의 문화를 개방정책으로 일본보다앞서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동양해상을 지배했던 장보고 제독을 생각해 봅시다. 좀 자신을 가지세요... 세계를 향해 눈뜨고 공부도 더하고..." 이를 계기로 필자는 꽤 많은 학생들을 만났다. 눈에 적의를 품고 반대만 했지 한국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꿈이나 책략은 학생들에게서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역사 의식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국제감각으로 강대국을 상대하는 스위스 벨기에 핀란드 등의 지혜를 배울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세상이란 묘한 것이다. 이렇게 경제인협회가 일본 협력에 열을 올리니 미국도 민간 경제계에 눈을 돌렸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미대사관이나, USOM측과 원조문제나 금리.환율 등을 갖고 수차 회합한 일은 있었다. 이들 문제는 주로 한국정부가 협상 대상이었다. 민간 경제계를 통한 수출,차관자본도입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62년 2월 "울산공업센터" 설치 후 밴프리트 사절단(62년 5월)이 방한했을 때는 제철 비료 정유 등에 대한 투자 의향서 교환이 있었다. 그러나 한.미 민간 경제계를 연결하는 상설 채널은 없었다. 일본과 관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나는 방향을 미국으로 돌렸다. 때마침 65년 7월 미국 AID(원조처) 극동국장이 내한하여 경제인협회와 간담할 기회를 갖었는데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서 민간경제사절단 파견 의향을내비친다. 그간 미국내 민간경제단체를 조사했으나 전국을 대표할 단체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미국은 연방국가여서 전국적 조직이 없었다. 미국에는 영국의 CBI나 일본의 게이단렌같은 국가 단위의 민간 경제단체가 없었다. 상공회의소만 해도 원래 지역상공인의 조직이라 전국을 대표할 조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첫 가교역할을 미국 AID에 부탁키로 한 것이다.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경제인협회가 일본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미국 민간 경제계도 한국과 교류에 눈을 돌린다. 그 결과로로 65년 7월 열린 한.미 경제협력 회의.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