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경제발전과 대기업 개혁 .. 박승 <중앙대 교수>

박승 196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을 주도했던 당시의 장기영 경제부총리는 두 가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하나는 "부채도 자산이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에게 몰아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본이 없는 나라에서 공장을 짓자면 외자나 은행융자와 같은 빚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마련한 투자자금은 한 사람에게 몰아줘서 공장을 짓게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그동안 우리나라의 초기적 경제발전이 재벌주도로 이루어졌던 역사적 환경을 엿볼 수 있다. 즉 한국의 재벌이라는 산업조직은 대내적으로는 산업화 초기단계에서,그리고 대외환경면에서는 보호주의적 산업질서에서 필요했던 것이다. 산업화 초기에 국내자본이 없고, 그래서 차입성장이 불가피하고, 산업은 중후장대의 장치산업 중심이고, 국제경쟁력이 없어도 정부의 보호정책 때문에생존이 가능하고, 그래서 정경유착이 불가피하게 되는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재벌이라는 산업조직은 후발주자가 빈손으로 단기간에 선발국을따라잡으려는 한국적 압축 성장모형의 특수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성장방식은 적중했던 것이다. 그런데 IMF사태를 전후하여 판이 바뀌게 된 것이다. 경제는 산업화 초기시대를 지나 성숙시대에 들어섰고 국제질서는 보호주의에서 개방시대로 이행하였다. 산업경쟁면에서는 규모시대에서 기술시대.전문화시대로 바뀌었고 그러다보니중후장대의 덩치크기가 오히려 짐이 되는 세상이 됐다. 거기다가 개방시대가 열려서 흑자가 없이 적자기업들을 끌어안고 갈 수도 없게 되었고 재벌기업이 어렵게 될 때 과거처럼 정부가 살려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세상이 됐다. 이런 점에서 재벌개혁은 우리 경제의 선진화와 산업의 현대화에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특히 현 시점에서 재벌개혁이 강조되는 데는 다음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지금까지와 같은 선단식 경영체제를 시정하지 않고는 향후 우리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재벌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거운이자 부담을 저임금으로 보상해 왔기 때문인데 고임금시대를 맞고 보니 이제 그러한 보상방식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개방시대에 들어선 오늘날에는 모든 계열기업과 모든 조직이 각각 국제경쟁력을 지녀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퇴출돼야 한다. 따라서 지금까지와 같이 재벌기업들이 상호보증 순환출자 부당내부거래 불투명경영 등의 방법으로 모든 계열기업들을 끌어안고 공생경영해 간다면 국제적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재벌기업이 잘못되면 그 빚은 납세자가 부담하게 된다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통상적으로 중소기업이 넘어지면 이것은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재벌기업이 경영에 실패하면 국민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결국 그 부채는 국가가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날 한보가 그렇지 않았는가. 이런 점에서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여러 재벌개혁정책들의 기본방향은 바람직하다. 재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대기업은 개인 재산을 축적해서 자손들에게 부를 물려주는 가업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초기산업화시대 중소상공인의 기업정신이다. 그리고 모든 개별기업, 모든 조직, 모든 종업원들이 각각 독립적인 경쟁력을갖도록 해야 하며 축적의 방법도 사회적으로 정정당당한가를 항상 가려야 할 것이다. 이 점이 수단 방법을 가볍게 생각했던 과거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한편 정부쪽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재벌개혁이 과거에 대한 응징이 돼서는 안될 것이며 미래지향적이라야 한다. 지난날 경제개발에 대한 재벌들의 공헌이 컸던 점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재벌개혁은 재벌죽이기가 아니다. 그 역할을 새로운 시대환경에 맞도록 바로 잡고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재벌개혁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 정부가 경제회생과 외교안보면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사소한 부분에서 국민적 신뢰를 얻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재벌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이끌어 내려면 정책의 순수성과 중립성을 행동화해야 하며 시장에 맡겨야 할 일까지 정부가 관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