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67) '금융회사'

[ 한국개발금융회사 설립 추진 ] 66년 한국개발금융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위원회가 발족됐다. 65년12월2일 귀국하니 세계은행(IBRD)의 산하기구인 국제개발기구(IDA)로부터 서신이 와 있었다. 금융회사 설립 조사단을 파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IDA는 후진국 장기금융을 지원하기 위해 IBRD가 60년에 설립한 기구다. 조사단장은 개발금융 전문가인 굴하티 박사였다. 경제인협회는 개발금융기구 설립 가능성이 대두되자, 9월5일 정식으로 이 기구를 설립키로 결의했다. 필자는 세계은행과 국제금융공사(IFC)와 교섭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필자는 워싱턴을 방문 때 이들에게 이사회 결의 등을 소상히 설명했다. 면담할 때마다 경제인협회에 대한 질문이 잇따랐다. 저개발국인 한국에 "경제인협회"와 같은 자율적 민간단체가 있다는 데 놀라는 기색이었다. 굴하티 일행은 그해 12월12일 협회를 방문했다. 그는 협회이사 전원에게 방한 목적을 설명했다. 참석자는 김용완 회장, 최태섭 구인회 임문한 진학문 부회장, 이정림 홍재선설경동 전택보 김용주 정주영 조홍제 이한원 조우동 등 경제계 중진들이 총망라됐다. 금융회사 설립에 대한 경제계의 관심도를 반영했다. 굴하티 단장은 금융회사 설립 타당성 조사단이 방한하기 앞서 예비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또 금융회사를 운영하는 주체가 될 민간경제계의 의지와 능력을 평가하겠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자본금을 비롯한 내외 재원 조달을 위한 법적, 제도적 정비상태와 정부의 의사 등을 타진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다음날 굴하티 박사는 필자와 단독으로 만났다. 주로 경제계 실태, 회장단의 지도력, 정부와의 관계 특히 한국에 있어서 민간 개발금융기구의 필요성 등을 물어 왔다. 필자는 이렇게 답했다. 한국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선 외자조달이 시급하다. 세계은행과 금융회사를 설립하게 되면 한국경제의 대외 신용도와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관치금융하에서 순수한 자율적 민간금융기관의 탄생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민간금융회사 운영을 통해 선진 금융기법을 배우고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렇게 설명하자 굴하티씨는 경제인협회 회장단 등 경제지도자들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으나 정부나 기타 외부 간섭 및 압력에 굴하지 않는 공정운영을할 수 있겠느냐며 의심하는 듯했다. 필자는 김용완 회장의 경력, 경방 설립(1920년)부터 공개주식회사로 출발한 점, 5.16 군사정부 하에서도 회장을 자율 선출한 사례 등을 열거했다. 그리고 수출주도 외자도입 개발전략제시 울산공업단지 구로동 수출단지 조성등등의 실적을 설명했다. 굴하티씨는 의외라는 인상을 지으면서 귀를 기울였다. 굴하티씨가 미국으로 돌아간지 반년도 안된 66년6월, 타당성 조사단 파견을 알려 왔다. 경제인협회는 금융회사 설립을 위한 준비에 지체없이 착수했다. 카이퍼 일행이 내한하기 전 "협회"내에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 홍재선 쌍용시멘트 회장, 부위원장에 김진형 전 한국은행 총재,실무를 책임질 "간사장"에 본인을 위촉했다. 66년4월21일 경제인협회 회장은 김용완 회장에서 홍재선 회장으로 바뀌었다. 김회장이 계속 고사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경제인협회 회장은 외부의 간섭없는 자율 선출의 관례를 더욱 굳힌다. 필자는 "설립준비위원회"간사장으로서 사무국을 조직했다. 협회 조사과장 윤병철씨(하나은행 회장)를 전담요원으로 하고, 2~3명을 추가했다. IFC 측도 타당성 조사준비에 들어간 듯 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준비사항 등을 점검했다. 필자는 IBRD나 IFC 같은 세계적 금융기관과 합작으로 개발금융기구 설립을 추진한다는 것은 둘도 없는 귀중한 기회라고 여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는 자세를 갖자고 윤병철씨와 서로 다짐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