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투데이] 말레이시아의 '자본통제' 의의

폴 크루그먼 말레이시아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정부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로서의 임무와 역할을 마냥 방기할수는 없었다. 소위 "유명하다"는 경제학자들중 말레이시아의 이단적 경제정책(자본통제정책)을 옹호한 유일한 인물이 필자였다. 최근 말레이시아를 방문하고 모하메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와 90분간 대화를 나눈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하티르 총리는 아시아 경제위기를 유태인 투기꾼들의 탓으로 돌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정책을 아시아의 재식민화를 꿈꾸는 서방자본의 음모라고 비난했었다. 아시아경제 위기 초기때는 그의 주장이 "바보같은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비웃을 수 없게 됐다. 위기가 처음 생각과는 달리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고 IMF의 처방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다는 의구심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하티르 총리의 음모론이 상상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몇몇 헤지펀드들은 98년 여름 서로 담합해 홍콩시장을 공격했다. 필자가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해 생각을 고쳐먹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구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가는 위기의 전염 속도를 보고 IMF 비판자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기는 경제현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려를 현실로 만든 심리적 공황상태에서비롯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자본흐름에 통제를 가하는 것도 상황을 바로 잡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세상에 드러내 놓기 시작했을때 마하티르와 그의 측근들은 이미 비밀리에 자본통제방안을 계획하고 있었다. 들은 바로는 필자의 주장이 계획실행의 결정을 내리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됐다고 한다. 당시 말레이시아정부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지지가 없어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하티르총리가 지난해 자본통제정책을 발표한후 그에게 공개서한을 띄워 자본통제가 장기화돼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이때 워싱턴 정가에서는 말레이시아의 자본통제정책을 "크루그먼-마하티르 합작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자본통제의 시행 초기에는 서방 경제학자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그들이 우려했던 경제기반의 붕괴나 물가급등, 암시장 창궐같은 일은벌어지 않았다. 최근에는 IMF조차 말레이시아가 탄탄한 경제회복의 궤도에 올라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지금은 말레이시아가 자본통제를 상당히 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빠져나가는 조짐은 거의 없다. 말레이시아의 이같은 자본통제정책의 성공은 마하티르총리의 "음모론"주장이맞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통제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들이 잘못으로 판명됐다고 해서 자본통제전략이 승리했다고 얘기하기도 어렵다. 이는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IMF처방을 따른 다른 나라들의 경제도 회복되고있기 때문이다. 자본통제정책을 실시하지 않은 한국이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고 있으며 태국과 심지어 인도네시아까지도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 사실 심리적으로 공황상태였던 시장은 말레이시아가 자본통제 결정을 내렸을때 이미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 대화에서도 마하티르 총리는 톤은 낮추었지만 예전의 음모론을 반복했다. 자본통제는 소규모 국가를 대형 투기꾼들의 "악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통제는 음모에 대항한다는 거창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공황상태를 차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대형 투기꾼들의 시장조작은 다른 투자자들의 공황적 심리상태를 유도하지 못하는 한 성공하기 어렵다. 이론적으로 홍콩에서와 같은 투기적 공격은 경제기반이 허약할 때만 가능하다. 투기꾼들을 너무 강조하면 자본통제가 장기화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자본통제가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방법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전에는 금융위기가 공황상태에서 기인했다 할지라도 내핍과 개혁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자본통제가 위기탈출의 최후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워졌다. 일부 우파 인사들은 말레이시아의 자본통제를 자꾸 칭찬하면 마하티르의 독재를 부추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전에 일부 좌파 인사들이 "칠레의 시장개혁을지지하면 피노체트의 독재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했던 게 생각난다. 중요한 것은 "경제학은 도덕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악인이 선정을 펼 수도 있고 선인이 악정을 펼 수도 있는 것이다. 경제학의 임무는 사람과는 관계없이 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다. ----------------------------------------------------------------------- 이 글은 폴 크루그먼 미 MIT 경제학교수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How Malaysia got away with economic hersy?"를 정리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