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춘희'로 살다간 오페라프리마돈나..타계한 김자경씨

우리나라 최초의 프리마 돈나인 김자경씨는 국내 오페라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난 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역을 맡아 소프라노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20년후인 68년에는 국내 최초의 민간오페라단인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해 오페라의 활성화에 앞장섰다. 창단 첫 작품으로 역시 "춘희"를 공연해 그에겐 "영원한 춘희"란 애칭이붙기도 했다. 이런 애칭 때문이었던지 지난 8월 그가 마지막으로 지켜본 김자경 오페라단의 공연도 역시 같은 "춘희"였다. 1917년 경기 개성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찬송가를 부르며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 35년 이화여전 음악과에 들어가 피아노를 전공하면서도 성악에 대한 미련을떨치지 않았다. 40년 이화여전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이화여고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하다 다음해 도쿄 미술학교 출신의 화가 심형구씨와 결혼했다. 국내 최초의 오페라 "춘희"는 48년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렸다. 그는 당시 소프라노 마금희씨와 주인공 비올레타역을 번갈아 5회씩 맡아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씨의 목에 이상이 생겨 그는 모두 8차례 무대에 올라야했다. 이때문에 "국내 최초의 프리마 돈나"란 수식어가 항상 김자경씨를 따라다니게 됐다. 그는 같은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한다. 5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53년부터 83년까지는 이화여대 성악과 교수를 지냈다. 김자경씨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는 62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면서 찾아왔다. 남편이기 이전에 음악친구인 심화백의 별세는 그에게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오페라에 대한 김자경씨의 사랑은 이런 절망도 쉽게 넘을 수 있게만들었다. "성은 오씨요, 이름은 페라라는 서방과 결혼했다"고 말하면서 다시 오페라발전에 열과 성을 바쳐나갔다. 김자경 오페라단은 지금까지 정기공연 56회와 소극장공연 6백여회를 소화하면서 한국 오페라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후학양성에도 힘을 써 이규도 남덕우 등 중진 성악가들을 가르쳤다. "마음으로 듣는 사랑의 노래"란 자서전과 "가곡 및 찬송가", "민요와 가곡집"등 음반을 남겼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