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과 전망] (신동욱의 멀리보기) PC와 종이의 미래

지난주는 모처럼 기술 기능인들이 바빴던 한 주였다. 실험실과 작업장에서 빠져 나와 이런 저런 토론 모임을 가졌고 또 서로 실력도 견주었다. 국내에선 과학기술부가 주최한 "2025년 과학기술 장기발전 비전" 공청회를 필두로 각종 과학기술정책세미나와 과학기술분야 기관장협의회, 과학기술정책토론회 등이 잇따라 열렸다. 해외에선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99추계 컴덱스"가 열렸고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는 제35차 국제기능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전체 영역은 넓기만 한데 개별 분야는 지극히 전문화 된 탓인지 과학기술기능계의 관심이나 견해는 좀처럼 하나로 모아지는 법이 없다. 기술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해서 반드시 승자가 되는 것도 아니어서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고 단정해 말하기 힘든 것이 이 분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주 과학기술계 모임들의 메시지는 꽤 명확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개인용 컴퓨터(PC)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컴덱스가 "저무는 PC시대"로 명명되고 있을 정도다. 물론 "저무는 PC시대"를 이어받을 새 시대의 주인공은 누구인지는 아직 불분명할 뿐이다. 이와 관련해 수많은 전망이 나오고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전자종이''다. 이 분야에선 제록스(Xerox)와 3M이 연대해 추진하는 자이리콘(Gyricon) 기술과, E잉크와 루슨트테크놀로지(Lucent Technologies)가 연대해 상품화를 서두르고 있는 이메디아(Immedia) 기술이 경쟁하고 있다. 이들은 어느 쪽이 승리하건 모두 PC는 물론이고 심지어 종이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모양은 종이 같고 쓰임새는 PC와도 같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값이 믿기 힘들 정도로 저렴하고 사용재질이 천 조각처럼 유연해 지금의 PC가 주는 부담감이 전혀 없다. 이들은 약간 두툼한 도화지에 맨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는 수 천 만개의 조그만 알갱이가 박혀 있는 형상이다. 도화지 뒷면에는 전선과 트랜지스터가 잉크로 찍은 듯 찍혀 있다. 뒷면 전선에 주어지는 전기흐름에 따라 개개의 알갱이는 하얀색이 되기도 하고 까만색이 되기도 하면서 글자와 그림을 그려낸다. 한번 형상이 그려지면 전류를 끊어도 그대로 있기 때문에 반영구적이고 휴대가 가능하다. 이것을 신문사이즈로 만들어 몇 십장 붙여놓으면 그대로 신문이 된다. 그것도 사람이 일일이 배달할 필요도, 인쇄기로 찍을 필요가 없는 신문이다. 전선이나 전화선만 연결해 놓으면 마음대로 어떤 신문이든지 이 전자종이에 담아 신문 보듯 넘겨보며 볼 수 있다. 이를 책 모양으로 만들면 책이 되고, 간판으로 만들면 간판이 되며, 벽지로 만들면 마음대로 무늬를 바꿀 수 있는 벽지가 된다. 이런 특성의 전자종이는 이미 상품화가 상당히 진척돼 있다. 일부 백화점이 이미 간판으로 쓰고 있다. 더 얄팍하게, 더 견고하게, 그리고 더 다양한 기능을 갖게끔 연구되고 있다. 최근 소니가 내놓은, 껌처럼 얇은 고용량 데이터 저장장치를 여기에 장착하면 수 백 권의 책을 한꺼번에 담아놓고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이런 신종 정보단말기가 3년 내지 5년 후면 보통용지 크기 장당 1천원 꼴로 시판될 것이라는 것이 개발회사들의 얘기다. 이 기술이 실제로 범용화 된다면 매일 매일의 인간 생활상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산업계에 엄청난 구조조정 바람이 몰아닥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 기술은 칼러 표현이 안 된다는 점에서 기존 TV나 컴퓨터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당부분 기존 정보기기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이 높다. 신문 제작과 배달 체계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신문 잡지 만화 등 컨텐츠 메이커들은 자본력, 판매망, 또는 윤전시설 등 양이 아닌 그야말로 컨텐츠의 질로써 경쟁하는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광고업계에도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매스미디어를 거치지 않고 각 소비자가 갖고 있는 전자종이에게 직접 광고를전하는 방법이 개발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지업계도 큰 변혁의 물결에 당황할 것이다. PC발명 후 말만 무성했던 이른바 "종이 없는 세상"의 실현이 가능해 질 것이다. 복사기는 옛날 카본페이퍼의 운명을 맞게 될 지 모른다. 출판업계에는 당연히 대량 도산 사태가 몰아닥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