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위기의 본질은 변한게 없다..이계민 <논설위원>

이계민 재작년 이맘때 우리 사회는 암울하고 어수선했다. 대통령선거를 20여일 앞두고 선거전이 한창이었던데다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대해 2백억달러의 긴급자금지원 요청을 공식 발표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국가부도위기 상황에 직면했던 당시의 사회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같은 위기를 극복하려는 국민적 결의 또한 대단했었다. 당시의 신문을 들춰보면 해외여행 취소가 줄을 이었고, 초등학생들이 외국동전 모으기 운동을 펼쳐졌는가 하면 너나할것없이 온국민이 소비절약에 앞장섰던 모습은 기억도 새롭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아직 일부 계층에 국한된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과소비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고,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아 저축률이 급격히 낮아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통계당국의 분석이다. 실제로 국민들의 생활형편이 다소간 풀렸으니 당연한게 아니냐고 치부하면서도 어딘지 씁쓰레한 뒷맛이 남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사실 IMF체제 2년의 경제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인색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정부의 노력에 의해 주도되었든 국민들이 보여준 고통감내의 결과든 따질 필요도 없다. 거시경제지표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뒷걸음질하던 경제성장률이 올들어 플러스로 돌아서 외환위기 이전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기과열을 걱정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시현으로 2년전 38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고는 7백억달러에 육박했다. 물가는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환율 금리등 정책변수들도 정상을 되찾았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우리의 국가신용도를 잇달아 상향조정한 것만으로도 일단 위기극복에 성공했다는 평가의 근거는 충분하다. 그러나 안심해도 좋다고 말할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난 2년의 성과를 "절반의 성공"이라거나 "미완의 개혁"이라고 평가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IMF체제를 불러온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단순한 외환유동성 부족이 아니라 고비용 저효율의 경제체질과 기업들의 방만한 부채경영,금융기관의 부실화등 경제의 총체적 부실이 누적된 결과임은분명했다. 그동안 이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결코 과소평가할수는 없지만 위기의 본질이 크게 변한 것은 없다.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돼 금융구조조정이 이뤄졌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도 금융불안의 어두운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기업경영 실적이 호전됐다고는 하지만 경영혁신에 의한 성과라기보다 저금리환율상승 인건비 감소등 외생변수들의 도움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다. 금융이건 기업이건 본격적인 구조조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위기극복에 대한 자신감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자만해선 안될 일이다. 정부나 기업, 그리고 소비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우선 정부정책의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응급처방이랄수 있는 지금까지의 경제개혁은 정부주도하에 이뤄진게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정도 원기를 회복한 지금은 최대한 시장자율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기업의욕을 북돋우는 정책적 배려가 절실하다. 물론 이는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구조조정 노력을 배가한다는 전제가 충족될 때 성립되는 논리다. 경제개혁의 주체가 지금까지의 정부에서 이제는 기업과 소비자들로 바뀌어야한다는 얘기다. 새로운 질서는 자생적으로 형성될 때 그 의미가 크고, 지속적으로 유지될수 있다. 정부의 힘에 의해 타율적으로 만들어진 질서는 결코 오래 갈수 없음은 과거의 경험이 증명한다. 정부가 해야할 일은 공정한 경쟁질서를 유지하는데 확고한 원칙과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경제의 양극화 시정과 성장잠재력의 회복은 정부의 대책이 필요한 과제다. 경기가 회복됐다고는 하지만 고른 성장이 이뤄지지 못해 건설등 일부업종은 아직도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중산층의 몰락과 빈곤층의 확대는 외면하기 어려운 새로운 이슈로 등장했다. 물론 재정적자의 확대와 물가안정, 국가신인도의 제고등 정부가 해결해야 할 난제들은 수없이 많다. 따라서 지금은 IMF체제 2년을 되돌아보면서 정책의 우선순위 재점검과 정책수단의 미조정이 절실한 시점이다. IMF체제의 완전한 극복은 경제만으로 이뤄질 일은 아니다. 정치 사회 문화등 사회 전반의 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IMF위기의 본질은 전혀 변한게 없다. 정부를 포함한 모든 경제주체들이 참담했던 2년전의 각오를 되새길 때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