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유로화 폭락과 시장논리

국제외환시장에서 유로화가 참담한 수모를 당하고 있다. 유로화는 외환시장에서 투매를 맞으면서 "1유로=1달러"와 "1유로=1백엔"의 위기에 몰렸다. 연초 유로당 1.17달러와 1백32.8엔에서 출범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폭락이다. 세계 기축통화 자리를 놓고 달러에 도전장을 냈던 유로화가 달러뿐 아니라 엔화에 대해서도 "백기"를 든 셈이다. 각국의 통화가치는 그 나라의 경제여건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척도다. 미국 경제가 3.4분기에도 5.5%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보일 만큼 탄탄하기 이를데 없는 반면 유럽경제는 이제 겨우 회복단계에 들어서 있는 정도다. 이런 점에서 유로에 비해 달러가 강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지난 26일의 유로화 폭락은 미국이 추수감사절 연휴가 있었던 것도 원인이었다. 외환거래량이 평소의 10분의1에 그친 점을 이용, 투기세력이 유로가치를 끌어내렸다. 그러나 유로화 폭락은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섣부른 "정부역할"에 대한 시장의 냉엄한 경고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유로존의 핵심국인 독일정부는 최근 파산위기에 몰린 건설회사 필립 홀츠만에 구제금융을 줬다. 1만7천여명의 근로자가 직장을 잃을 것을 우려, 4억2천5백만달러를 대준 것이다. 게다가 영국 무선통신업체 보다폰이 독일 통신업체 만네스만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나서자 딴지를 걸고 나섰다. 독일정부는 적대적 M&A가 독일의 기업문화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24일 미국 코카콜라의 프랑스 음료업체 오랑지나 인수를무산시켰다. 프랑스 음료시장의 60%를 장악하고 있는 코카콜라가 오랑지나마저 인수할 경우 프랑스 음료시장이 코카콜라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차가왔다. 기업의 운명을 시장에 맡기지 않는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참견은 유럽 경제회복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시장은 평가했다. 정부가 망가져가는 기업을 억지로 살려내고 M&A를 방해하는 태도는 유럽 경제회복의 필수조건인 기업구조조정을 더디게 할 뿐이라는 따끔한 충고였다. 최근 국내로 외국인투자자금이 쇄도하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평가 때문이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당시처럼 시장논리를 거스르는 어떤 행위도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 유로화 폭락사태로 다시 되새겨볼필요가 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