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임준수 스크린 에세이) '러브 레터'..첫사랑의 허무

첫 사랑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이다. 꿈많던 사춘기에 맺어졌건, 성인이 된 후에 이뤄졌건,연모의 첫정을 나눈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첫 사랑의 추억이 또 다른 사랑을 갖는 데 굴레가 돼서는 곤란하다. 만일 첫 애인의 환영에 사로잡혀 두번째 사랑을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새출발을 위해서라도 일본영화 "러브 레터"를 봐 두는 것이 좋다. 제명이 약간 신파조이긴 하지만 매우 담백한 화면으로 첫사랑의 아련함과 허무를 펼치고 있다. 이 영화는 하나의 예화를 통해 첫 사랑이란 허구일수도 있다는 것을 매우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여주인공이 그렇듯 못잊어하는 첫 남자에겐 자신을 만나기 전에 마음속에 둔이성이 따로 있었다는 것. 이를테면 그녀는 불평등 첫사랑을 했다는 것이다. 첫사랑 조건에 "피차공통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야 애틋함이 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차 첫사랑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았으련만, 영화는 끝까지 남자의 과거를 들춰 여주인공이 고이 간직한 추억에 큰 상처를 입힌다. 더구나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서 어차피 잊혀질 사람인데... 이와이 순지 감독이 "모른는 게 약"이라는 진리를 모를 리 없건만 그가 있을 법도 없는 이야기를 길게 꾸민 것을 보면 첫사랑에 우는 여성에 각별한 연민을 품은 것 같다. 진실해부의 테마와는 달리 영화색깔은 매우 서정적이다. 눈 덮인 일본의 시골풍경을 자주 등장시켜 첫사랑의 순백 이미지를 한껏 펼쳤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첫사랑한 것도, 다른 여자가 그 남자의 짝사랑을 확인한 것도, 문제의 남자가 조난사고를 당한 것도 모두 눈과 연결돼 있다. 눈덮인 산골을 찾아 첫 사랑을 앗아간 산마루를 향해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처연하다. 자신을 따르는 제2의 남자를 뒤에 세워 둔채 안타깝게 허공에 띄우는 문안의말엔 "이젠 내 가슴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다른 남자를 받아 들이겠노라"라는 과거청산의 의미가 강하다. 여주인공이 불평등 첫사랑을 했다는 사실은 안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그녀도 인간인지라 한번쯤 억울함을 느낄 법도 한데 영화는 끝내 실망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담담하게 끝낸다. 좀 싱거운 마무리이긴 해도 여러 갈래의 상념을 일으키는 여운이 있어서 좋다. 그것은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일 수도 있으며, 첫사랑에 대한 허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첫사랑에 우는 여인이여! 이젠 새 사랑을 찾으라"는 메시지다. 애인 바꾸기를 밥먹듯 하는 요즘 세상에 무슨 태고적 이야기인가 싶은데도 애잔한 이 서정극에 청춘남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첫 사랑의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