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골프일기] '공포의 빨간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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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분 필드행 전날밤이면 나는 고민스러운게 있다. 연습을 제대로 안해 다음날 필드에서 헤매는 것도 걱정스럽지만, 그 걱정을 조금 더 압도하는 것은 "내일은 또 뭘 입고 가야 하나"다. 없는 옷에 이 옷도 대보고 저 옷도 대보고 한참 고민에 싸인다. 아무렇게나 입고 가자니 나만 혼자 튀어 눈총을 받을 것 같고, 매번 다른 사람들처럼 빼입고 가자니 그건 더 어려운 일이다. 골프 티셔츠 한벌값이 웬만한 정장 한벌값과 엇비슷하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트로 맞춰사려면 그야말로 허리가 휘청거린다. 똑같이 땀흡수하는 옷인데 왜 테니스복이나 다른 운동복보다 골프웨어만 그렇게 비싸야 하는지 모르겠다. 비싼 만큼 뚜렷한 개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계절별 유행패턴이 있어서 그 옷이 그 옷이다. 다들 비슷한 옷이기 때문에 클럽하우스에서 동반자라도 찾을라치면 한참을 휘 둘러봐야 겨우 눈에 들어온다. 입은 사람은 신경써서 입었을지라도 멀리서 보기엔 다 비슷비슷한 스타일이 마치 유니폼같다. 얼마전 플레이. 샷도 맘에 안들고 입고 나온 옷도 다른 사람에 비해 튀는 것같아 신경쓰일 무렵, 아주 근사한 분을 보았다. 앞팀 남자분이었는데 개성있는 차림이었다. 여름 반팔 티셔츠 두 개를 겹쳐입고 그 안에 긴팔 폴라셔츠, 그리고 구김이 간 진바지를 받쳐입은 모습이었다. 허물없는 의상에서 나오는 멋진 샷과 깍듯한 매너. 비록 유명브랜드는 아니었지만 내가 본 골퍼중 가장 필드와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멋을 내고 있었다. 골프는 자연과 가장 가까운 운동이라지만, 골프웨어만큼은 지나치게 정형화돼있는 듯 싶다. 왜 꼭 칼라가 달린 셔츠에 조끼를 받쳐 입어야 하는지, 왜 명문 골프장이라는 곳은 소매없는 옷이나 반바지를 못입게 하는지... 여름이면 바지밑단이 땀에 뒤엉켜 걷기도 힘든데 말이다. 그런 규제가 혹시 더 골프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운동"으로 만드는 것은아닐까. 사실 비싼 옷 입고 매너 안좋은 사람들 많이 봤고, 완벽하게 세트로 맞춰입은 사람치고 골프 잘치는 사람 못봤다. 유명브랜드 일색의 틀을 벗어던지고 개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의상. 그럼으로써 골프비용이 덜 부담스러워지는 분위기가 절실하다. 그러기 위해선 "있다"는 골퍼들 스스로의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내게는 언니가 직접 뜨개질해 선물한 빨간모자가 있다. 털실에다 커다란 리본까지 달려있어 쓸 엄두가 안나는 "공포의 빨간모자"다. 빨간털모자를 쓴 내모습이 생각만해도 우습지만 다음번 플레이 때는 그 "공포의 빨간모자"를 쓰고 나갈 용기를 한번 내봐야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