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시간여행 (상)] 자본시장 변천 .. '주요사건 일지'

20세기 한국자본시장이 성장하는 데는 고통도 많이 따랐다. 그중에서도 62년에 발생했던 증권파동과 70년대 중반에 일어났던 건설주파동 82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사건 등은 큰 충격을 주었다. 증권파동은 62년 당시 일부 증권업자들이 시세조작을 겸한 과당투기로 정상적인 거래가 마비되는 상황까지 연출했던 사태다. 5.16으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창당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증권시장에 개입해 증권파동을 일으켰다는 의혹도 일고 있다. 파동의 중심에는 한국비료사장을 지냈던 윤응상씨가 있다. 윤씨는 군사정권의 실세 등과 친분이 두터웠던 인물. 윤씨는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을 집중매집하면서 주당 5전에 거래되던 이 주식이 21환10전까지 폭등했다. 당시 증권거래소 이사장이던 주기식씨는 대증주에 대해 1백% 증거금 납부를 검토하는 등 사태수습에 나섰으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해임됐다. 그는 결국 재판에 회부됐다. 이 과정에서 윤씨 등은 한전주를 싯가보다 싸게 불하받기도 했다. 윤씨는 액면가 50전짜리 대증주를 2천8백%의 프리미엄을 붙여 일반청약 받았으나 청약이 부진해지면서 다른 기관투자가들이 대증주를 집중매도하기시작했다. 윤씨는 대증주를 적극 매수하며 주가방어에 나섰으나 자금이 고갈됐고 거래가 불가능해졌다. 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2백80억환을 융자해줬고 이것으로 증권파동은 끝났다. 건설주파동은 지난 70년대 중반 중동건설붐을 타고 건설주에 "묻지마투자"가 유행한 것을 말한다. 건설자만 붙으면 무조건 상한가를 기록했다. 코스닥이나 우선주 열풍은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화학업체인 건설화학이 건설자가 붙었다는 이유로 상한가에 연일 올랐을 정도다. 당국에서는 급등종목에 대해 가격변동폭을 줄이는 등 여러가지 대책을 내놓았지만 건설주 상승세는 2년가까이 지속됐다. 그러나 중동건설붐이 한풀 꺾이면서 건설주는 급락했다. 작전세력들이 날뛰면서 개인투자자들은 상당한 손해를 보기도 했다. 이철희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은 "단군이래 최대 사기"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낮은 금리인 20%의 이자로 2년거치 3년분할상환을 조건으로 뭉칫돈을 건네고 빌려준 돈의 2배가 넘는 액수를 어음으로 받아 할인한 것. 천문학적인 액수의 어음이 유통되면서 자본시장 전체에 메가톤급 충격을 안겨줬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