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말말말...] '영혼의 옷' 짓기 .. '시어로 본 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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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위 시는 시인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무척 공감했다. 하지만 허물어지고 싶어도 견뎌야 할 인생은 단 한번 뿐이라는 수식어를 잊기 힘들다. 그래서 이 일회성이란 조건이 인간에게 끝없는 욕망을 부추긴다.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이미지 중에 인간의 "옷"만큼 상징성이 강한 것도없다. 올 한햇동안 내게 강렬하게 떠오른 단어는 "옷"이다. 1년간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한 옷로비 사건, 그 거액의 모피코트와 탈옥수신창원의 티셔츠가 생각난다. 옷로비 사건이 권력을 빙자한 도적질이라면 신창원은 가난을 빙자한 도적질일 것이다. 전자가 온 국민에게 지도층에 대한 분노와 실망만 주었다면 후자의 죄는 적어도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신창원 티셔츠와 모피코트는 이 시대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아닐까. 신창원의 티셔츠는 연두색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주황색, 노란색도 아니다. 주변환경에 따라 달리 보이는 카멜레온의 빛깔을 지난 티셔츠는 복잡다단한 시대를 견디기 위한 갑옷처럼 보였다. 모피코트는 살생과 희생의 의미를 품고 있다. 동물의 불행은 인간의 기쁨인가. 동물애호가의 비난이 두려워 미국 지도층도 안입는다는 털가죽. 부정부패가 날뛰는 이 땅의 일부지도층에겐 선물용 애호품이다. 이 내면성이 결여된 화려한 옷과는 달리 우리 시대 시인들의 옷은 어떠할까. 어쩌면 시인들의 옷은 하늘을 닮거나 구름과 이슬 등 가장 순수한 자연을 닮고자 하는 노력인지 모른다. 영혼의 옷을 짓는 시인의 시어는 어떤가. 올해 작고한 조태일 시인. 그는 마지막 시집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에서 이슬을 "작아서 작아서 늘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현종 시인은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에서 "너는 내 속에 샘솟는다/갈증이며 샘물인/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나의 생래적 조건..."이라고 했다.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등을 보면 시인들이 꿈꾸는 옷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가장 작고 하찮지만 그것이 주는 아늑함에서 자기 내면의 옷을 구한다. 이렇게 연륜이 깊은 옷만큼이나 젊은 시인의 "쓸쓸하지만 열렬히 펄럭이는"옷도 시선을 끈다. 군부독재 시절에 구속되기도 한 연유로 이제 시집을 낸 이산하 시인은 "천둥같은 그리움으로", 김기택 시인은 "사무원"을 통해 도시인의 모습을 풍자했고 여성시인 이선영은 "평번에 바치다"에서 다들 뛰고 싶어하는 현 세태와는 달리 소외되어온 평범한 것들에 주목된다. 그녀는 시 "헐렁한 옷"처럼 좋아하는 헐렁한 옷에 아주 평범한 것의 소중함을 간직한다. 서동욱의 시집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 둔 날"에서 정신의 알몸과 상처가 그대로 옷이 될 수 있음을 보았다. 김태동이 9년만에 낸 시집 "청춘"보다 최근 시 "눈동자"를 보고 나는 기뻤다. 이 시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읊는 시인의 마음. 어떤 옷보다도 큰 우주의 옷을 끌어안고 있다는 느낌은 지나칠까. "너무도 멀리 있는 그대의 숨결을 듣는 방입니다. 그대는 동굴같이 붉은 꽃을 모시고 그렇게 살았지요. 그대는 그렇게 물위에 둥둥 떠 나를 보았지요.눈동자는 물결에 휩싸이지만 그대가 안고 가는 정원은 둥근 천국에 서 있는 입술. 달은 그대의 몸을 감고 그대의 숨결은 휘황한 달빛이 되곤 합니다.그대는 나에게 말하세요. 나는 뼈가 부서져도 그대의 곁에 그렇게 아름다운 정원으로 남아 있어요" 시인들의 옷은 자연을 닮아 있다. 풀과 바람과 달빛... 아무튼 가장 사소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베풀기만 하는 자연의 체취가 있다. 이런 시인의 옷은 누구에게나 있다. 노래방에 가보라. 사무치게 노래하는 사람마다 시인이 아닌 자가 없다. 시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시인이다. 이땅에 부정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시를 읽는 인구가 자꾸 줄기 때문이 아닐까. - 신현림(시인)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