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다임 2000] '21세기 한국경제의 활로' 특별대담

세기말에 닥친 외환위기는 한국의 산업구조는 물론 일반시민의 의식과
관행에까지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각 분야에서 부실이 도려내졌다. 그 자리는 "국제 기준"으로 대체됐다.

특히 기업과 금융회사는 과거엔 경험하지 못했던 구조조정을 치렀다.

그런 한편으로는 정보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면서 주도산업 자체가
뒤바뀌고 있다. 특히 인터넷은 새 밀레니엄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기존의 질서 체계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자율화화 분권화 욕구는 사회저변에서 일어나는 또다른 새바람이다.

새 밀레니엄을 우리는 어떻게 맞아야 하는가. 무엇을 털어버리고 어던 것으로 채워야 하는가.

박영철 고려대 교수와 김병주 서강대 교수가 만나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새 밀레니엄에서 풀어야할 과제를 얘기했다.

----------------------------------------------------------------------- 박영철 교수 =급격한 변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가 아니더라도 산업계와 사화전반에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몰아닥치고 있어요.

과연 "새천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종전의 의식과 행태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다음 세기를 조망하기에 앞서 우리가 과연 외환위기에서 빠져 나왔는가
하는 점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병주 교수 =외환위기의 본질이 다양한 원인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한마디로 탈출여부를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단순히 국제적인 유동성 문제만을 놓고 보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촛점을 확대해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금융기관의 부실과 제조업의 부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개선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관치금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국제시장에서 자금을 빌릴 때 적용받는 금리만 보더라도 여전히 "위기국"
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거시경제지표 몇가지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데 만족해선 안됩니다.

박 교수 =물론 흡족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실의에 빠져있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97년말만해도 IMF(국제통화기금)나 IBRD(세계은행)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등의 국제기구를 비롯해 대부분의 연구기관들은 한국이 지금의 상황까지
회복하는데 최소한 3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몇가지 구조적인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당초 예상했던 상황을 감안
한다면 예상보다 1~2년정도 빨리 경제회복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제 외형적인 정리가 어느정도 진행된 만큼 질적인 구조개혁이 뒷받침되게
한다면 진정한 "위기탈출"로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김 교수 =미시적인 변화를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융분야를 우선 정리해 보지요.

은행과 비은행 부문으로 나눠볼 때 은행의 구조조정은 상당히 진척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실은행이 퇴출됐고 외국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곳도 있습니다.

사외이사다 외부감사다 해서 제도적인 측면도 어느정도 개선된 듯 합니다.

그렇지만 선진적인 금융관행이 정착됐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투자신탁을 포함한 비은행 분야는 아직 구조조정이 안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 교수 =기관자체의 구조조정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원칙이 정립되지
않은게 문제입니다.

금융회사의 지분을 외국에 넘기고 있는데 그 이전에 잣대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지요.

제조업에 주어선 안된다든가 얼마까지 가질 수 있게 허용한다든가 하는
원칙이 서있지 않기 때문에 그저 외국에 주는 도리밖에 없어요.

외국자본을 유치하는 게 잘못됐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원칙안에서 작동돼야 한다는 얘깁니다.

편견을 갖지 말고 진진한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김 교수 =국영화와 관치금융 심화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 한국은행간의 역할과 권한이 불분명해요.

금감위는 금융산업 구조조정에다 기업구조조정까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정책수립과 집행간의 한계도 불분명하고요.

공적자금이 대규모로 투입되면서 당국의 힘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화됐습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으면 오히려
금융자율화의 후퇴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박 교수 =금융분야의 개혁이 관행과 제도의 환골탈태로 이어지지 못하는
면도 있습니다.

이를 "무늬만 개혁(Cosmetic Reform)"이라고 비꼬는 외국인도 있는게 사실
입니다.

그간 자기자본비율 대손충당금 대출건전성 지배구조 등 여러 분야에서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정착여부는 또다른 문제 예요.

토착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 교수 =금융도 그렇지만 기업 쪽에서의 구조조정도 외형에 그치고
있다는 게 제견해입니다.

5대 재벌의 경우 어렵사리 부채비율 2백%를 맞추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
합니다.

특히 대우 사태에서 경험했듯이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다는 것은 한국
경제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입니다.

소액주주의 입지가 강화된 점도 주목할만 합니다.

문제는 대기업그룹들의 경영행태예요.

수치상 개선을 이유로 과거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에각 그룹은 대규모의 사장단인사를 단행했어요.

선단식 경영시대의 옛날 관습이지요.

박 교수 =크게 보아서 5대그룹 부문은 지배구조 등에서의 변화가 더
필요하고 6대이하의 그룹에서는 구조조정이 더 진전돼야 합니다.

5대그룹의 경우엔 경영의 민주화 여부를 따져봐야 합니다.

가족증심 체제에 변화가 없어요.

핵심분야에 경영역량을 집중시키는 노력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6대이하의 그룹에선 사업주들의 기피로 구조조정이나 자산부채교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은행도 추가대출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일 생각을 아예 갖고 있지 않습니다.

중소기업은 거의 무방비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 =의사결정 구조가 여전히 비정상적이지요.

하지만 무조건 핵심사업으로 전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엔 공감하지 않습니다.

제품의 수명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기 때문에 대기업도 유연하게 신규사업에
참여하고 퇴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박 교수 =당연히 대기업에게도 성장산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다만 이런 결정이 여전히 오너 가족에 의해 결정된다는게 문제이지요.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합리적인 투자가 결정된다면 무방하겠지요.

이제는 우리 대기업들도 국제적인 룰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김 교수 =요즘 벤처기업 열풍이 불고 있어요.

주식시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벤처기업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한데 그 이면에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투자액의 몇 백배씩을 벌어들인다는 얘기에 너도나도 무분별하게 뛰어드는
경향도 있고 사회전체적으로 "투기"분위기가 확산되는 경향도 있고요.

일너 부작용들이 과도기적 양상으로 끝나야 할 텐데요.

박 교수 =창의와 도전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야 말로 새천년을 맞는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지요.

인위적으로 가로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건전성을 근간부터 흔들 수 있는 일은 막아야지요.

예를들면 코스닥에서의 지나친 과열은 금융당국이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것입니다.

외환위기를 지내면서 고금리와 주가급등 등으로 빈부격차가 오히려
벌어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부"의 분배가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통계가 없어요.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주장으로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부"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되야 한다는 말입니다.

김 교수 =외환위기의 과정에서 중산층이 몰락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재산분포도를 그리면 허리부분이 통통해야 하는데 모래시계 모양으로
허리가 잘룩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이 그런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어요.

중산층을 육성한다는 것은 옳은 방향이지만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지나치게
중산층을 의식하면 정책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고용문제에서도 잘못 이해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요즘 실업률은 낮아지지만 고용의 질이 떨어졌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연봉직이나 계약직이 늘어났다는 점이 너무 부각되는 것은 곤란
하다고 봅니다.

노동시장의 신축성은 앞으로 더욱 높아져야 합니다.

박 교수 =사회안전망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시장의 신축성이
너무 빠른 속도로 높아지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우려가
제기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회안전망에 대해서도 점더 정밀한 시각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개방화사회에서의 사회안전망이 누구를 보호하는 것인 지가 불분명합니다.

잘못 만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국민이 국제무대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데 신경을 더 써야 합니다.

김 교수 =임금구조도 선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기업들을 보면 대졸 신입사원과 최고경영자간의 연봉차이가 7~10배에
불과합니다.

임금을 인상할 때마다 상박하후 형태로 해온 영향이 크지요.

이같은 격차를 20배수준으로 확대해 최고경영자가 책임에 부응하는 보수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정보화가 진전되면서 조직내에서 중간층은 줄어들거나 얇아질 것입니다.

이제 연공서열은 더이상 인사관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박 교수 =국제화와 세계화의 개념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진 것을 놓고 국제관계를 지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일본 등 주요국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상황이었다는 정황적
요인을 말하는 겁니다.

흔히들 국제화라고 하면서 국내기업이 외국에 진출하거나 외국기업이 국내로
진입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기본적으로 국가간의 관계와 문화적 토양을 수용
하는게 중요합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행동한다는 자세가 필요해요.

김 교수 =그렇습니다.

한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을 보면 묘하게도 1백년 전과 상당히 흡사
합니다.

열강들이 시장개방을 요구하고 우리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위기에 빠지고 마는 순서까지 비슷해요.

만일 과거의 냉전구조가 지속됐더라면 외환위기 때의 상황도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냉정하게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이런 점을 감안해 국제정치와 안보 등에서 다각적인 관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 되기도 했는데 우리
것이라도 세계 구미에 맞지 않으면 수정하고 보완해야 합니다.

박 교수 =지난 10년간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개방화, 세계화 등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노사문제, 대기업의 민주화, 남북한 관계에서는 큰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기에 대한 과제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중에서도 남북문제일
것 같아요.

운동선수와 예술단이 오가고 있기는 하지만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통일에 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고 어떤 순서로 통일에 접근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
를 형성해야 합니다.

느닷없이 통일을 맞을 경우엔 엄청난 혼란이 올수도 있어요.

김 교수 =인구학적인 변화도 주시해야 합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이 사라질 것입니다.

현재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의 10% 수준이고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더 줄어들게 됩니다.

여기에다 수십조원을 투입하는 것은 그 타당성을 따져봐야 합니다.

노령화와 출산감소에 따라 생산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예요.

기본여건의 변화에 너무 둔감한 것 같습니다.

박 교수 =역시 산업의 흐름을 뒤바꾸고 있는 주역은 정보화와 지식기반화
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정보.지식화사회로 이행되면서 기존의 시장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통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각종 원칙들도 먹혀들지 않아요.

불확실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지요.

지식과 정보화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인프라를 확실하게 다져야 합니다.

국가적 역량을 결집시켜야 합니다.

김 교수 =지식기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암기식 교육에서 벗어나야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인재들이 변호사나 관료가 되겠다고 몰리는 것부터 시정돼야 합니다.

창의를 발전시키고 자율적 역량을 키워 주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박 교수 =사회 전반에서 "다양화"를 수용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분권화와 지방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외환위기를 치르는 과정에서 은연중에 "중앙집중"이 더 심해졌는데 이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그쳐야 합니다.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 천이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도 마찬가지로 횡적 기능이 강조돼야 합니다.

개발연대식의 일방통행식 사회시스템이 바뀌어져야 선진화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김 교수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이 지금처럼 드높아진 때가 없었어요.

박 교수의 말씀대로 분권화의 한 단면이라고 봅니다.

다만 분권화가 진전될수록 그 부작용 또한 커질 것입니다.

"룰"과 "창의"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라 하겠지요.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