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85) '전경련..'

[ 전경련 사업보고서 ]

전경련의 아.태경제사절단(1967년10월22일~12월2일)은 경제계로 하여금
새로운 시야와 전략을 짜는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일본.유럽 3각 구도에서 동남아.대양주라는 세계를
향한 새 창구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재계 지도자들은 또 한반도의 지정학적 취약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싱가포르와 호주 시찰과정에서 재계는 우리나라가 세계 교통.정보망에서
크게 벗어난 동북아 변방에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꼈다. "한국은 지정학적 취약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국의 홍콩화 가능성은"

이것이 아.태 경제사절단에게 주어진 화두였다. 김용완, 홍재선, 임문한 회장은 전경련이 이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필자에게 요구했다.

특히 일본 도쿄대, 고등문관 출신이자 농림장관도 역임한 임 회장은 아.태
진출방안을 조속히 마련하자고 적극성을 보였다.

필자는 1968년초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취약 극복방안을 마련해줄 것을
"경제.기술 조사센터"에 의뢰했다. 기본 구상은 임해공업벨트(Belt) 지대 설치였다.

필자는 이 구상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영토 쟁탈전은 끝났다. 경제
발전은 부존자원이 아닌 수송력이 좌우한다. 세계 각처에서 대형 선박을
이용, 최저 가격으로 자원과 시장을 확보하는 나라가 승자가 될 것이다"

벨기에 네덜란드는 자원 빈국으로 롯델럼, 라인강 활용으로 19세기 선진
공업국을 이룩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30만t에 이르는 초대형 수송선(원유, 원광 겸용선도 있음)으로 자원 보유국
인 미국보다도 더 싼값에 원자재를 도입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 철강산업이 일본과 한국 포항제철에 뒤진 근본적인
이유다.

이를 위해선 반드시 항만시설과 대형 수송단이 있어야 한다.

또 1950년대말부터 세계의 이목을 끈 "아일랜드 섀난(Shannan) 수출자유
공항"의 실상도 예로 들었다.

이러한 전후 각국의 발전전략을 본떠 한반도 동.남해안 "임해공업벨트"
구상을 제출했다.

센터는 김영우 차장을 팀장으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이들은 건설부, 건설연구소의 협력을 얻어 1차 초안을 작성했다.

1969년1월20일 수출확대회의를 통해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필자에게
구체적인 추진안을 지시했다.

그런데 이때까지 필자는 부산 이외의 남해안 지역을 방문한 일이 없었다.

명색이 남해안 공업벨트 조성을 운운하면서 아직 그 근처도 답사하지 못한
것이 불안했다.

때마침 호남정유 예천공장 준공식(1969년6월)이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 필자는 준공식 직후 여수만을 빠른 걸음으로 돌아봤다.

여수 항구의 우측에는 일제시대때 건설된 간이비행장 자리가 있었다.

활주로를 포함해 약 5만평은 쓸 수 있을 것같았다.

그러나 너무 협소해 다른 곳을 물색해야겠다는 1차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호남정유의 특별열차로 여수까지 내려오면서 구인회 회장(LG 설립자)
과 단독 대화의 기회를 가졌다.

구회장과 같이 VIP객실에 필자가 타게 된 연유는 이러했다.

열차가 달리는데 구평회 상무(후에 무역협회 회장)가 허겁지겁 왔다.

"김형, 구 회장 차로 자리를 옮겨 주시면 하오"

"왜..."

"글쎄. 우리 형님이 넓은 객실에 혼자 계시니"

말하자면 LG임직원들은 어려워서 구 회장 옆에 앉기를 주저한다는 말이다.

평소 자상하기로 이름난 회장도 "정상의 고독"을 피할 길은 없는 듯했다.

제6차 수출확대회의에 보고된 전경련 구상을 약술한다.

1) 후보지-여수 마산 김해 목포 등 남해안 기존항구 2) 규모-1차 25만평
3) 지역수는 3개 지역으로 하되 1개 지역은 3년 내에 완성하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5년에 걸쳐 추진 4) 이 3개 수출지역 완성 후 이를 연결하는
임해공업벨트 조성구도 마련 5) 관민합동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모든 추진
일정을 제3차 5개년 경제계획에 통합시켜 운영할 것을 건의했다(1969년전경련
사업보고서).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