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86) '후보지..'

[ 후보지선정 작업 ]

1969년 상반기 "수출자유지역" 선정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든다. 여러 이유로 마산이 부각됐다.

당시 경부고속도로가 이미 착공(68년 2월)됐고 62년에 출범한 울산공업단지
입주 공장 건설도 한일차관 유입 등으로 눈에 띄게 진척됐다.

누가 봐도 영호남간 발전 격차를 느끼게 했다. 필자는 직감적으로 수출자유지역 제1호는 호남지역인 목포나 여수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거점으로 낙후된 호남을 발전시키는 기폭제로 삼자는 생각에서였다.

관민추진위원회에서 이런 생각을 강력히 제안했다. 필자는 목포에 가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나, 앞으로 황해경제권의 큰 중심이 목포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목포는 일제시대 한국에서 매년 1천만~1천5백만석의 쌀을 일본에 반출한
주항구였으니 항만여건도 괜찮을 것으로 짐작했다. 마산을 반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산의 경우 굳이 수출자유지역을 설치하지 않아도 부산 경제권의 외각지대
로 수려한 경관만으로도 계속 발전할 수 있다.

굳이 공장을 끌어들여 그 좋은 풍경을 훼손시킬 필요가 없다.

물론 목포가 불리한 점도 있었다.

"수출자유지역 선정 보고서"에 의하면 목포는 영산강의 토사유입으로 추가
조성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마산 23억원, 목포 58억원, 삼천포 30억원, 여수 40억원 등으로 조사단은
조성비용을 산출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반론 또한 끈질겼다.

"마산과 목포의 설치비용 차액은 약 35억원. 영남지역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4백억원 이상을 투입해야 한다. 이밖에 군 공병단 동원, 기타
부대시설 비용 등을 감안하면 훨씬 많은 재원이 투입돼야 한다. 그런데 단돈
35억원 차이때문에 목포 대신 마산을 택한다면 "호남 푸대접론"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부는 8월2일 마산으로 정했다.

필자는 지금도 이 선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가 아쉽고 서운하기까지 한 것은 목포를 선정하려는 필자의 고군
분투(?)에 호남에서 아무 호응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훨씬 훗날의 일이다.

고인이 된 최종현 전경련 회장은 지난 96년 지방경제인간담회를 광주에서
개최했다.

이때 필자도 동행했다.

3백명이 훨씬 넘는 호남지역 경제인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광주, 목포지역에 투자해 달라는 요청이 터져 나왔다.

필자의 귀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듣고만 있는데 사회를 보던 조규하 당시 상근부회장이
필자를 지목했다.

어리둥절한 터에 잠깐 뜸을 들이고 다음과 같은 요지를 말했다.

"우는 아이 젖 더 준다는 속담과 같이 여러분의 투자요청은 불원간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계속 소리를 높여 투자유치를 외치십시오. 그런데 제가
69년 마산대신 목포를 수출자유지역으로 선정할 것을 주장할 때 이곳 분들
호응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는 솔직히 좀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투자유치를 열망하는 것을 보고 이 지역은 단시일 내에
발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중 나온 뿔이 더 우뚝하다는 말과 같이 광주.
목포 지역은 투자 환경을 잘 꾸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환경친화적 첨단산업
기지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69년 8월 5일, 마산수출자유지역 설치 결정이 내려지고 상공부가 주관부처로
됐다.

곧이어 70년 1월1일 "수출자유지역 설치법"이 공포됐다.

이 법의 목적은 "관계법령의 적용이 전부 또는 일부가 배제되거나 완화된
보세구역의 성격을 띤 특수지역 설정"에 있다.

즉 수출입 절차, 각종 세무, 인허가 업무 등 행정 일체를 창구일원화 해서
간소화하자는 게 법 운용의 핵심이었다.

이 창구일원화는 전경련의 끈질긴 주장의 결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