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정치기상도] 누워 침뱉는 '음모론'

음모론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매우 "효율적"이다.

여기서 "효율적"이란 말은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적은 투입(input)으로
엄청나게 큰 산출(output)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천년 벽두 정치권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낙천 낙선운동 음모론"을
보면 인간사회에 대한 모든 이론 가운데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음모론의 "효율성"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투입 측면을 보자.

음모론은 원래부터 사실적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음모는 남이 알면 이미 음모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음모론의 근거는 언제나 막연한 추측뿐이다.

하나의 음모론이 성립하는 데는 문제가 된 어떤 사건으로 이익을 보는
개인이나 집단이 있으면 충분하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쪽은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으며 애쓰지도
않는다.

당하는 쪽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

자민련이 지금까지 총선시민연대와 민주당 또는 청와대가 반년 전부터
꾸몄다는 "보수세력 죽이기 음모"의 사실적 증거를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 데서 보듯 음모론의 속성은 원래 그런 것이다. 음모론의 투입요소는 말 몇 마디에 불과하지만 산출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모든 음모에는 극적인 요소가 있다.

어두운 지하밀실에서 열리는 권력자와 하수인의 비밀스런 만남, 음험한
간지를 담은 모사의 눈빛과 낮은 속삭임, 검은색 서류가방에 든 채 건네지는
거액의 공작금.

모든 음모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흥분을 일으킨다.

게다가 사람에게는 드라마를 보고 즐기려는 본능적 욕구가 있다.

음모론이 내포한 극적인 요소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매스미디어
산업에 의해 대량소비 상품으로 만들어져 드라마에 대한 대중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파고든다.

문제의 사건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쪽은 음모를 꾸민 "나쁜 나라"가 되고
손해를 보는 쪽은 왠지 죄도 없이 당하는 "착한 나라"가 되어 세간의 동정을
사게 되는 것이다.

단 한 장의 홍보전단도 뿌리지 않고 한 오라기의 사실적 근거도 없는 몇
마디의 말만으로 단숨에 사태의 흐름을 반전시키는 이 엄청난 "효율성",
이것이야말로 정치권력을 둘러싼 싸움에서 음모론이 수천년 동안 최고의
인기와 불멸의 생명력을 자랑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런데 낙천.낙선운동에 관한 한 음모론은 어딘가 아귀가 제대로 맞질
않는다.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어학자가 편찬한 사전을 보면 "음모"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첫째는 "남이 모르게 일을 꾸미는 꾀"요 둘째는 "범죄에 관한 행위를
비밀히 의논함"이다.

대통령과 시민단체 대표들은 첫째 의미의 음모를 꾸미기에는 너무 우둔하다.

남이 모르게 일을 꾸며야 음모라 할 수 있을텐데 대통령이 시민단체의
선거법 87조 위반행위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옹호함으로써 자기네가 사실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벌였노라고 만천하에 선언한 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우둔한 음모자들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을 정도로 절묘한
"낙선.낙천운동 음모"를 고안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두번째 의미를 보아도 낙선.낙천운동은 음모가 아니다.

이건 범죄도 아니고 몰래 꾸민 행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는 지난해 정기국회 국정감사 시민 모니터가 끝난 후부터
낙천.낙선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이런 움직임을 전혀 몰랐다면 자민련은 먼저 시민운동을 아예 무시해
버렸던 자기네의 정치적 오만과 무지를 자성해야 한다.

시민단체가 공개적으로 벌인 일을 자기네만 몰랐다고 해서 음모로
몰아치는 건 누워서 침뱉기라는 사실을 이제라도 자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