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영어 공용화' 선수 친 일본 .. 문휘창 <교수>

문휘창

국제사회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 중 영어를 가장 못하는 민족은
아마도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일 것이다. 정치인 사업가 유학생 등 대부분이 외국인과 대화하고 토론할 때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은 어느 정도 되는데 말하는 것은 국제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

그런데 일본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최근 일본 총리 자문기구인 "21세기 일본의 구상"간담회가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찬반의견이 분분해 영어공용화가 곧 현실화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세계화에 있어 우리보다 한수 앞선 것은 분명하다. 한국에선 이런 공식적인 제안이 나오기 힘들다.

만일 한국의 대통령 또는 총리자문기구가 이러한 제안을 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수용해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시행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우리의 국민정서에 아직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단 공식적으로 공표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은 특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한국의 어떤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는 "한국은 자국의 워드프로세서를
갖고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라고 주장해서 국민적 공감을 얻은 적이
있다.

어떤 외국인은 "한국은 차이나타운이 형성될 수 없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라고 했다.

기존의 민족주의는 한국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한국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된다.

기존의 민족주의가 외세에 대항해서 우리 것을 보호하는 소극적 개념이라면,
새로운 민족주의는 우리 것을 대외에 개방하고 외세를 수용해서 우리 것을
더욱 강화해 나가는 적극적 개념이어야 한다.

특히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나라는 소극적 민족주의 개념으로는 궁극적
으로 자국의 체제를 보호하고 발전시킬 수가 없다.

북한 쿠바 그리고 이라크 등과 같은 소극적 정책이 아니라 네덜란드 스위스
싱가포르 등과 같은 적극적 정책을 취해야 한다.

적극적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세계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세계화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영어실력이 필수 조건이다.

세계화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얻고 또 세계화에 동참하는 수단이 바로
영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계화 및 영어사용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해 보자.

첫째, 세계화는 우리 것을 버리고 무조건 외국의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세계화는 우리 것이 좋으면 우리 것을 취하고 외국 것이 좋으면
외국 것을 취하는 것이다.

어떻게 들으면 가벼운 생각 같아서 우리 국민정서에 안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 경영 부문에 있어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얘기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의 부품 중 한 개가 국산으로는 국제경쟁력이 없을 때
외국 것을 사오거나 외국에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국산이 좋으면 우리 것을 쓰는 것이다.

세계화란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영어를 쓴다고 해서 우리 말이나 문화가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영어 잘하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교육만 잘 시키면 언어는 두세 개 정도는 힘들이지 않고 잘 할 수 있다.

오히려 상승 효과가 있다.

최근 싱가포르대학의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중국어와 영어를 둘 다 잘하는
학생이 그 중에서 하나만 잘하는 학생에 비해서 제3의 언어(일본어)를 더욱
쉽게 습득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외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자국어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를 소극적 적극적으로 구분한 것처럼, 언어주의도 소극적
적극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를 보호하기 위한 소극적 언어주의란 외래어를 가능한 한 전부
우리말로 번역해서 우리만 알도록 쓰는 것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많은 스포츠 용어를 이렇게 쓰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과거에는 비행기 라디오 등을 순수 우리 말로 표현해서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우리 언어를 진정으로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없다.

영어는 더 이상 영국어 또는 미국어가 아니다.

세계어다.

사실 영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들 언어는 세계어인 영어 속에서 유지되고 발전돼 가고 있다.

우리말도 세계어 속에 들어가려면, 아니 세계어가 되려면 우리말 속에서
외래어를 무리하게 번역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원어대로 수용할 수 있는
적극적 정책을 취해야 한다.

1백여년 전 제1의 세계화 물결이 왔을 때 일본은 선진 문물을 과감히
받아들였다.

반면 우리는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다.

일본이 우리보다 선수를 친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아직도 일본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다.

이제 제2의 세계화 물결이 다가왔다.

영어 공용화 문제 등으로 일본이 또 한 걸음 앞서가는 느낌이다.

앞으로 1백년 후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