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셋톱박스 '뭉쳐야 한다'

최근 디지털 셋톱박스 생산업체인 A사 김 사장은 두바이로 날아갔다.

중동지역 바이어와 디지털 위성방송수신기(일명 디지털 셋톱박스)의 수출
계약을 맺으러 가는 길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선 김 사장은 바이어에게서 두툼한 서류뭉치부터 받아야 했다.

A사가 수출계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국내 경쟁업체들이 보낸 서류
였다.

도저히 불가능한(?) 납품가격을 제시한 것부터 A사를 제조업체가 아닌
단순한 오퍼상이라고 비난한 내용까지 다양했다. 바이어를 설득한 끝에 계획대로 계약은 맺었지만 귀국길 비행기에서
김 사장은 답답함을 느꼈다.

작년부터 국내 디지털 셋톱박스 생산업체들은 중동시장에서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외국기업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국내 업체끼리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하지만 이 전쟁엔 서로 손해보는 무분별한 가격경쟁과 비방만이 있을 뿐
합리적인 경쟁원리는 찾아 볼 수 없다.

사실 한국의 디지털 셋톱박스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는 1995년부터 현대 삼성 LG를 중심으로 디지털 방송기술에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다. 실제로 지난달 중소기업청이 실시한 품목별 기술수준평가에서도 위성방송
수신기는 유럽의 노키아 필립스 등과 대등한 기술력 및 품질을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연간 1천만대 시장인 유럽에서 삼성전기와 휴맥스는 유럽의 내로라하는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30%를 웃도는 시장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달엔 알파캐스트가 프랑스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와함께 현대디지탈테크 AMT 한단 등이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 대기업 출신 엔지니어들이 뭉친 소규모 벤처기업들까지 합치면
한국은 디지털 셋톱박스에 관한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기술인력을 보유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지나친 가격경쟁 등으로 기술력에 걸맞은 "돈벌이"를 못한다는 데
있다.

이제 불필요한 경쟁을 자제하고 "제값받기"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선 흩어져 있는 기술인력을 한곳으로 모으고 부족한 해외 영업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테면 디지털 셋톱박스를 생산하는 벤처기업끼리 주식 맞교환 등을 통해
M&A를 이루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디지털 셋톱박스 시장을 주름잡는 세계적인 벤처기업을 만들고
외국기업들과 멋진 "전쟁"을 치러보면 어떨까.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