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정치기상도] 정치권 흑백논리

세계적 차원의 냉전은 벌써 10년 전에 끝났다.

하지만 비정한 철책이 허리를 동강낸 한반도만은 예외다. 그리고 냉전은 휴전선만이 아니라 한반도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회는 공히 일종의 비상공동체로 출발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비상공동체였고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마수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비상공동체였다. 정상적인 공동체는 합의에 근거를 둔 자유로운 인간들의 자발적인 결사이다.

그러나 비상공동체에서는 집단적 생존이라는 긴급한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체제이다.

휴전선 북의 공화국은 여전히 완벽한 비상공동체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은 지난 10여년간 정상적인 공동체를 향해 전진해왔다.

하지만 국가안보라는 집단적 목표를 위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비상한 법률을 고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이렇게 된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국회를 통해 입법권
을 행사하는 정당들이 비상공동체의 성격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진실이나 소신, 민주주의 기본원리보다 당의 집단적 이익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하는 모든 언행은 해당행위요
인간적 배신이 된다.

민주당은 오랜 세월 독재정권의 재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비상공동체였다.

그런데 집권당이 된 이후에도 이런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대통령인 김대중 총재가 당대표와 주요 당직자를 임명하고 동교동계 실세
들이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좌지우지해도 내놓고 비판하는 이가 별로 없다.

김종필 전 총리가 이끄는 자민련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공동여당에서 내부고발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야당을 이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적 애당심 때문이다.

지난 2년 동안 유일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소위 김대중 독재를 저지하는
비상공동체였다.

비리혐의자와 반인권 범죄혐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방탄국회를
열었고 "반DJ" 말고는 어떤 정치적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회창 총재는 여러 계파가 공존하는 한나라당을 이회창 중심의 비상공동체
로 만들기 위해서 비주류를 일시에 제거하는 공천을 감행했다가 정치적 난관
을 만났다.

한나라당은 낙천자를 중심으로 태동한 민주국민당을 "민주당 2중대"라고
비난함으로써 우리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뿌리 깊은 냉전적
사고를 다시 한 번 드러냈다.

그럼 민주국민당은 어떨까.

보수세력의 킹메이커 김윤환 의원과 마지막 재야 장기표씨처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을 한 지붕 아래 입주하게 만든 이념은 "반DJ 반이회창"
하나뿐이다.

나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 반대하기 위해서 결성한
정당에 비상공동체 말고 다른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강령과 민주적인 공천절차를 선보일지는 며칠 더 기다려봐야
겠지만 "역시나"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정상적인 공동체라고 할 만한 정당은 민주노동당
하나뿐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노동계급과 진보적 지식인 집단에서 지지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의 미래에 회의적이다.

이번에 단 한석만 얻어도 큰 성공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는 다른 모든 종류의 주의와 달리 특정한 세계관이나 이론이 아니라
절차의 정의를 핵심 내용으로 한다.

언론이 기성권력의 이합집산에만 눈길을 주면서 민주적 경선으로 후보를
뽑는 민주노동당의 실험을 주목하지 않는 현실은 부패한 정치만큼이나
걱정스런 사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