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4) 제1부 : 1997년 가을 <1> '폭풍전야'

"그럼 우리 나라 제조업 전망은 어떻게 보십니까?"

박인호 사장이 진성호 회장에게 물었다. "한국의 노동집약적인 제조업은 국제경쟁력을 잃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말에 의하면 1987년 그 빌어먹을 6.29 선언이 있으면서부터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그때부터 벌써 10년째 연간 임금 상승률이 2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쟁국인 대만은 10%에 불과합니다.

미국과 일본은 3% 이하고요.

물태우가 다 망쳤지요." 황무석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진성호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황무석이 다시 부동자세를 취했다. "물태우도 물태우지만 그 빌어먹을 놈의 좌경세력이 원흉이오.

다 잡아다가 싹 쓸어넣어야 하는 건데.

박정희라면 그렇게 했을 거요"

전직 국회의원 출신인 박인호 사장이 화를 못 참겠다는 듯 들고 있던 펜을
탁자에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주유소 망을 추진하고 있는 계열사 사장이 끼여들었다.

"물태우가 선거가 급하니까 중간평가니 뭐니를 국민에게 약속한 거지요.

결국 노동자들의 인심을 사려다가 이 지경이 된 셈입니다.

5천억이나 꿍쳐놓고 있었으니...

세상에 그런 잡놈이 어디 있어요?"

또 다른 계열사의 사장이 말했다.

진성호가 손을 내저어 그들의 말을 막으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죽은 박정희를 다시 살려낼 수도 없고 물태우도 이제 철창 안에 갇혀
있으니 얘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살 길을 찾아야지요.

모름지기 사업가는 사회여건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주어진 사회여건하에서
최선을 뽑아내는 것이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황 부사장 계속하세요."

진성호가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레저 산업하의 골프장 사업건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운영중인 3개의 골프장 외에 제주도와 경북지방, 호남지방에 골프장
건설허가를 추진중에 있습니다."

박 사장이 앉은 자리에서 손을 살짝 들었다.

"박 사장님 말씀하시지요."

황무석이 말했다.

"현정부에서 말이오, 공직자의 골프장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 않소.

그거 언제쯤 풀릴 것 같소?

풀려서 공직자가 골프를 칠 수 있어야 회원권 분양이 제대로 될 텐데
말이오.

사업하는 사람들이 자기 골프 치려고 비싼 회원권 사겠소?

공직자 대접하려고 울며 겨자먹기로 사는 거지...

황 부사장 생각은 어때요?

골프장 건설을 공직자 출입금지가 해지될 때까지 연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좋은 말씀입니다.

회원권을 사는 동기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공직자들을 접대하기 위한 거고, 둘째는 회원권 값이 오르리라는
기대 때문이고, 셋째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후부터 음성자금이 제대로
갈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공직자 출입이 허용되지 않더라도 금융실명제가 있는 한 저희 쪽
기대치는 유지되리라 봅니다." 황무석의 말에 박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