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4월의 문화인물 서화담..박성래 <한국외대 과학사 교수>
입력
수정
오는 4월 "이 달의 문화인물"은 화담 서경덕이다.
선거로 전국이 온통 시끌벅적한 오늘의 이 땅에서 거의 5백년 전의 서경덕을 생각해 보는 것은 산뜻한 느낌을 준다. 서경덕은 한 평생 관직에 오른 일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히 많은 책을 써서 후세에 남긴 것도 아니다.
그의 글을 모은 화담집은 부피도 크지 않아 요즘 말로 번역해서 작은 책 한 권이 될 정도일 따름이다. 일생의 몇 대목에서 그는 굶기를 밥먹듯 했다는 기록도 보이니 부자가 아니었음은 너무도 뻔하다.
그러고서도 서경덕은 존경받았고 지금도 존경받는 우리 역사의 영웅이 됐다.
왜 그럴까. 물론 그의 이름을 우리 모두에게 친숙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당대의 명기 황진이가 그를 사모했다는 짝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찌나 유명한지 작년 말 네티즌들로부터의 여론 조사에서 우리 역사의 대표적 로맨스로 뽑혔을 정도다.
그러나 황진이와 서경덕이 모두 실재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들 둘이 정말 만나기라도 했었는지는 확인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아니 오히려 서경덕과 황진이의 로맨스는 뒷날 제자들에 의해 가공된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의심도 들 지경이다.
그러면 어떻게 서경덕은 그리도 유명한 인물이 됐던 것일까.
그는 당대에 이미 존경받는 인물로 여겨졌다.
또 그 존경은 역사를 통해 눈덩이처럼 불어나 오늘의 서경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은지 반 세기 뒤이기는 하지만,경연(임금과 신하들의 공부와 토론 자리)자리에서 선조는 신하들과 서경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상수학과 주역의 대표적 학자라 말한 사실이 선조실록에 보인다.
잘 살펴 보면 그가 사후에 바로 그렇게 존경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519년(중종 14년) 처음으로 조선왕조는 천거과 또는 현량과라는 과거제도를 만들어 숨어있는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기로 했다.
이 제도에 따라 서경덕은 바로 여기 추천됐다.
하지만 그는 사양하고 아예 나가지 않았다.
또 43세 때인 1531년에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사마시에 합격한 일은 있지만,그후의 대과에는 응시하지도 않았다.
또 다시 추천돼 관직에 임명된 적도 있었지만 일절 사양하고 말았다.
그는 철저하게 관직을 사양하고 화담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평생 관직에 몸담은 일이 없는 그에게 사후에 영예가 밀려들게 됐다.
1567년(명종 22년)에는 호조좌랑에 추증됐으며,1575년(선조 8년) 5월에는 우의정 겸영경연 감춘추관사에 올랐다.
또 문강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그가 문강공 서경덕이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더 없는 영광이라 할 법하다.
그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들어올 시절에 주기론을 힘써 주장한 장본인이다.
우주 만물의 조화 주체를 기라 주장하는 그의 생각은 당시 주류를 이룬 학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비슷한 시대의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서경덕의 사상을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옳지 않다고 비판한 기록도 보인다.
하지만 이황과 이이가 상당한 벼슬에 올라가 사회참여에 열성이었던 것과 달리 서경덕은 일절 관직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뒤로 갈수록 그의 역사적 위상을 높여주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서경덕이 몰두했던 상수학이나 주역은 모두 우주와 인류의 운명을 연구하려는 학문이다.
그는 우주의 사이클을 원-회-운-세로 나타냈는데 1세란 30년을 가리킨다.
그리고 1운이란 12세,즉 3백60년을 가리킨다.
1회란 다시 30운을 말하니까,1만8백년이 된다.
다시 그것(1회)을 12배로 만든 1원은 12만9천6백년이라는 긴 우주의 주기가 된다.
세대를 30년이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표현에서 유래한다.
4월 총선을 앞둔 한국 정치판을 보노라면 오늘의 한국인은 한 두 세대의 생명을 가지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내달리는 형국이다.
하지만 서경덕은 실제로는 2세대도 채우지 못한 일생을 살았지만,훨씬 긴 시간을 내다보며 산 것이 분명하다.
이미 그는 "1운대=3백60년" 이상을 살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 "한 회대=1만8백년" 이상을 살아 갈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한번쯤 "이달의 인물" 서경덕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선거로 전국이 온통 시끌벅적한 오늘의 이 땅에서 거의 5백년 전의 서경덕을 생각해 보는 것은 산뜻한 느낌을 준다. 서경덕은 한 평생 관직에 오른 일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히 많은 책을 써서 후세에 남긴 것도 아니다.
그의 글을 모은 화담집은 부피도 크지 않아 요즘 말로 번역해서 작은 책 한 권이 될 정도일 따름이다. 일생의 몇 대목에서 그는 굶기를 밥먹듯 했다는 기록도 보이니 부자가 아니었음은 너무도 뻔하다.
그러고서도 서경덕은 존경받았고 지금도 존경받는 우리 역사의 영웅이 됐다.
왜 그럴까. 물론 그의 이름을 우리 모두에게 친숙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당대의 명기 황진이가 그를 사모했다는 짝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찌나 유명한지 작년 말 네티즌들로부터의 여론 조사에서 우리 역사의 대표적 로맨스로 뽑혔을 정도다.
그러나 황진이와 서경덕이 모두 실재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들 둘이 정말 만나기라도 했었는지는 확인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아니 오히려 서경덕과 황진이의 로맨스는 뒷날 제자들에 의해 가공된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의심도 들 지경이다.
그러면 어떻게 서경덕은 그리도 유명한 인물이 됐던 것일까.
그는 당대에 이미 존경받는 인물로 여겨졌다.
또 그 존경은 역사를 통해 눈덩이처럼 불어나 오늘의 서경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은지 반 세기 뒤이기는 하지만,경연(임금과 신하들의 공부와 토론 자리)자리에서 선조는 신하들과 서경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상수학과 주역의 대표적 학자라 말한 사실이 선조실록에 보인다.
잘 살펴 보면 그가 사후에 바로 그렇게 존경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519년(중종 14년) 처음으로 조선왕조는 천거과 또는 현량과라는 과거제도를 만들어 숨어있는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기로 했다.
이 제도에 따라 서경덕은 바로 여기 추천됐다.
하지만 그는 사양하고 아예 나가지 않았다.
또 43세 때인 1531년에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사마시에 합격한 일은 있지만,그후의 대과에는 응시하지도 않았다.
또 다시 추천돼 관직에 임명된 적도 있었지만 일절 사양하고 말았다.
그는 철저하게 관직을 사양하고 화담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평생 관직에 몸담은 일이 없는 그에게 사후에 영예가 밀려들게 됐다.
1567년(명종 22년)에는 호조좌랑에 추증됐으며,1575년(선조 8년) 5월에는 우의정 겸영경연 감춘추관사에 올랐다.
또 문강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그가 문강공 서경덕이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더 없는 영광이라 할 법하다.
그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들어올 시절에 주기론을 힘써 주장한 장본인이다.
우주 만물의 조화 주체를 기라 주장하는 그의 생각은 당시 주류를 이룬 학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비슷한 시대의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서경덕의 사상을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옳지 않다고 비판한 기록도 보인다.
하지만 이황과 이이가 상당한 벼슬에 올라가 사회참여에 열성이었던 것과 달리 서경덕은 일절 관직의 유혹에서 스스로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뒤로 갈수록 그의 역사적 위상을 높여주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서경덕이 몰두했던 상수학이나 주역은 모두 우주와 인류의 운명을 연구하려는 학문이다.
그는 우주의 사이클을 원-회-운-세로 나타냈는데 1세란 30년을 가리킨다.
그리고 1운이란 12세,즉 3백60년을 가리킨다.
1회란 다시 30운을 말하니까,1만8백년이 된다.
다시 그것(1회)을 12배로 만든 1원은 12만9천6백년이라는 긴 우주의 주기가 된다.
세대를 30년이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표현에서 유래한다.
4월 총선을 앞둔 한국 정치판을 보노라면 오늘의 한국인은 한 두 세대의 생명을 가지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내달리는 형국이다.
하지만 서경덕은 실제로는 2세대도 채우지 못한 일생을 살았지만,훨씬 긴 시간을 내다보며 산 것이 분명하다.
이미 그는 "1운대=3백60년" 이상을 살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 "한 회대=1만8백년" 이상을 살아 갈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한번쯤 "이달의 인물" 서경덕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