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24) 제1부 : 1997년 가을 <2> '예술과 인생'

[ 글 홍상화 ]

"오체투지례를 하는 티베트인들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어.
아주 행복한 표정이었어.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결론이 나왔어.온몸을 바쳐 섬기는 것이 있기 때문이야.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부처가 결코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그렇다고 현세에서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도 아니지만 행복한 내세 그 한 가지만은 기약해 주지.나도 윤회를 믿기 시작했어.다음번 세계에서 내가 무엇으로 태어나기를 원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 진성구가 이혜정의 눈을 보며 말했다.

"무엇으로 태어나기를 원해요?"

"혜정에게 달려 있어.맹수든 조류든 혜정과 같이 태어나기를 원해" 이혜정이 고개를 숙였다.

진성구가 다시 술을 들었다.

"걱정 마.나는 지금 아주 행복한 사람이야.왜 행복한지 알아?
나는 자연을 사랑하고 있어.하지만 자연은 여자와 같아.너무 사랑하면 배신을 당하게 돼.너무 깊은 사랑을 감당 못하는 여자의 본성과 마찬가지야.자연도 자신을 인간이 너무 사랑하면 단조롭게 보여 싫증 내도록 변신하지.한데 참 다행스러운 것이 있어.자연과 경쟁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 거야.뭔지 알아? 역사야.인간이 만든 역사만이 자연과 경쟁상대가 돼" 진성구는 잠시 목을 축인 후 이혜정에게 말을 계속했다.

"결국 자연과 역사가 끊임없이 경쟁하는 거야.인간이 자연과 역사를 온몸을 바쳐 사랑한다면 자연과 역사는 그 인간의 사랑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는 거야.내 사랑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는군요"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어.어린아이로 계속 남아 있고 싶어서야.로마의 철학자인 키케로가 한 말이 있지.역사 앞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은 모두 어린아이라고.여행을 하면서, 인간이 만든 역사의 유물을 대하면서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라는 생각을 하지"

이혜정이 침묵을 지켰다.

"...혜정이는 연습하는데 가야지"

"오빠는 어디로 갈 거예요?"

"나도 몰라. 일단 전철을 타는 거야.지금 시간쯤이면 나처럼 얼큰히 취해 귀가하는 사람들이 많겠지.그들과 나는 다른 점이 있어.
그들은 가족이 있는 곳으로 귀가하지만 나는 귀가 전 어디를 들를까 결정하는 거야.그리고 마음 내키는 전철역에서 내리지.그게 내가 향유하는 자유야.전철역을 나오면 포장마차가 많아.그곳에 들러 한잔 하면서 다음번 찾아갈 자연과 역사는 어디로 정할까 생각해 보지.내 사랑을 줄 곳을 결정하는 거야.어디선가 나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그들을 위해서 말이야..."

진성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혜정을 먼저 가게 하고 카운터에 가서 계산한 후 진성구는 밖으로 나왔다.

이혜정이 그곳에 서 있었다.

"전철역까지 같이 갔다가 돌아올게요"

"그럴 필요 없어" "그러고 싶어요"

진성구는 이혜정과 함께 혜화역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