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29) 제1부 : 1997년 가을 <3> '흔들리는 노욕'

글 : 홍상화

황무석은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에 들어섰다. 뮤지컬 공연을 보러 아들과 작은딸이 아내를 데리고 갔는데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딸 내외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시댁 쪽에 일이 있어 못 간 듯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9시 뉴스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여느날 뉴스와 마찬가지로 10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 뉴스로 서두를 장식했다.

여러 후보로 갈라져 서로가 서로를 물고 물어 뜯기는 판에 박은 내용이라 이제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 빌어먹을 금융실명제인가 뭔가 하는 제도를 깨부술 당의 후보가 정권을 장악하기를 바랐다.

바보놈들! 현금 뭉치 가지고 있는 놈 치고 세금 다 낸 깨끗한 돈이 어디 있어? 세금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데...

그러니 구린 돈 드러낼 수도 없으려니와 세금 내느니 먹고 마시고 여행하고 흥청망청 살아보자는 거지...

뭐 어쩌구 어째?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자기네들이 정치자금 거둬들이느라고 역사를 다 망가뜨려놓고 이제 와서 역사를 바로잡는다고...

황무석은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뉴스 진행중인 텔레비전을 껐다.

그는 서재로 가 책장 한쪽 구석에 가려져있는 금고 앞에 주저앉았다.

금고의 다이얼을 잡고 오른쪽으로 아들 출생년도의 마지막 두 자리 숫자를 돌린 후 왼쪽으로 큰딸 출생년도의 마지막 두 자리 숫자에 맞춘 후 다시 오른쪽으로 작은딸 출생년도의 마지막 두 자리 수에 맞춘 후 손잡이를 잡고 금고를 열었다.

금고 속에 차곡차곡 쌓인 달러 뭉치와 대해실업의 주권 뭉치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달러로 바꿔 이렇게 금고에 간수해두는 것이 이자를 낳을 수 없는 단점은 있으나 금융실명제가 위세를 떨치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대해실업의 주가조작이 시작된 후 긁어모았던 주식을 내다 팔아 들여온 돈으로 암달러 시장에 가 달러를 사들이느라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회상하니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는 금고 안에 있는 대해실업의 주권 중 일부분을 꺼냈다.

내일 팔아 다시 달러로 바꿀 예정이었다.

여하튼 빠른 시일내 혹시나 이정숙이 입방아를 찧기 전 사내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샀다는 증거는 완전히 사라지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가조작 사실이 드러나 정밀 수사를 하면 어떤 경로를 거치든 자신의 주식거래 사실이 드러나게 됨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금고 문을 닫고 응접실로 나왔다.

황무석은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낯익은 토크쇼 사회자의 얼굴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카메라가 롱 샷으로 바뀌면서 사회자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여성이 화면에 나오자 황무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허벅지가 보일 정도로 짧은 스커트를 입은 이정숙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귀가 전 최상의 에로티즘에도 실패한 그였으므로 이정숙의 허벅지가 지저분해 보였다.